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오직 은혜로 택하신 자들만 부르심에 응하게 하신다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부르심의 전 과정이 불가항력적인 은혜

하나님은 오직,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자들을 자기의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에 의해 지정되고 받아들여진 시간에 본성적으로 처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적으로 부르기를 기뻐하시는데 그들의 마음에 영적이고 구원에 유익한 빛을 비추셔서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의 돌 같은 심령을 제거하시고, 그들에게 육신의 부드러운 심령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다시 새롭게 하시며, 자기의 전능하신 권능에 의해 그들이 선한 것을 결정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자기의 은혜를 입은 그들이 원하게끔 만들어서 가장 자유롭게 오게 하신다.” (10.1)

하나님은 정하신 자들을 택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택하심이 없이는 부르심이 없고, 정하심이 없이는 택하심이 없다(엡 1:4~5). 정하심과 택하심과 부르심, 즉 예정(豫定)과 선택(選擇)과 소명(召命)이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뜻’과 ‘계획’에 따른 것이다(엡 1:5, 9, 10).

하나님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이 땅에서 부르시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며(稱義), 거룩하게 하시며(聖化), 영화롭게 하신다(榮化)(롬 8:30).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요셉과 같이 구덩이와 감옥에 갇혀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같이 사자 입과 불 속에 던져져도, 끝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비할 수 없는 존귀함을 얻게 된다(창 37:24; 39:20; 41:41; 단 3:19~30; 6:1~28). 하나님은 자기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그들 자신의 것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끊어져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신다(롬 8:39). 오히려 야곱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기도하느라 허벅지 관절이 끊어져야 우리를 축복하시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하신다(창 28:28~32).

하나님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 2:7; 3:1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모든 민족에게 가서 세상 끝날까지(마 28:19~20), 땅 끝까지(행 1:8)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만민이 복음을 듣게 하신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생명의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요 1:4, 9~13).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1:24).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롬 11:5, 7)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하시는 새 영을 받아 영적인 일을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고(고전 2:10, 12~13),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보고 듣게 된다(마 13:16). 그리하여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게 된다(엡 4:1).

하나님은 자기가 택하신 자들만 부르심에 응하게 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이 떨어지게 하시나, 택함 받은 자들만 ‘예’와 ‘아멘’을(고후 1:18, 20) 하게 하셔서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가운데(롬 10:10),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마 13:23). 곧 그들이 속에서 ‘믿음의 말씀’이 역사하여(롬 10:8; 딤전 4:6) ‘믿음의 비밀’에 사로잡히게 하신다(딤전 3:9).

2. 특별한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소명

이 효과적인 소명은 결코 사람 안에서 예견되는 어떤 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에 속한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고 다시 새롭게 될 때까지는 철저히 수동적이다. 그때 그는 이 소명에 응답하고, 그 가운데 제공되고 제시된 은혜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유아기에 죽는 택함 받은 유아들은 기뻐하시는 때, 장소,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서 중생하고 구원받는다.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받을 수 없는 택함 받은 다른 모든 자들도 또한 그러하다.”(10.2~3)

하나님의 부르심은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전부 은혜로’(tota gratia) 주어진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향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듯이(습 3:17), 우리는 그의 부르심을 이기지 못한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면,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요 15:11).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부르심은 오직 자기의 열심에 말미암는다(시 126:2~3; 왕하 19:31).

하나님이 베푸시는 부르심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엘리사처럼 소를 버리고(왕상 19:20),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물을 버려두고(마 4:20),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버려 두고(요 4:28),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 젖을 먹여야 할 송아지들을 집에 가두고 메어 본 적이 없는 멍에를 멘 채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울면서 치우침 없이 벧세메스로 나가서 끝내 번제로 드려지는 두 암소들과 같이 순종하게 된다(삼상 6:7~14).

택하신 분이 부르시고, 부르신 분이 부르심에 응하게 하신다.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해서 된 것도 아니다(롬 9:16). 우리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다(요 1:13). 구원에 이르는 효과적인 소명(vocatio efficax, effectual call)은 청함에 앞서는 택함으로 말미암는다. 그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그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의로 구원을 얻도록 정하신 자들은 결코 버림을 받지 않는다(롬 8:32; 요 6:37).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부르심의 소망’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된다(엡 1:18~19). 부르심의 역사는 우리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 ‘뜻의 결정’, ‘뜻의 비밀’, ‘계획’에 달려 있다(엡 1:5, 9~10). 그러므로 유아들이나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른 부르심만 있으면 구원에 이르는 소명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철저히 수동적’(omnino passiva, altogether passive)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지대로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행위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일지라도 주님은 안으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신다(막 10:13~16). 그들에게는 ‘청함’이전에 ‘택함’이 있기 때문이다.

3. 무조건적 선택에 필히 따르는 유효한 소명

택함 받지 않은 다른 자들은 비록 말씀의 사역에 의해 부름을 받고 성령의 통상적 역사들을 다소 누리기는 하나 결코 그리스도에게로 참되게 나아가지 않으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기독교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성의 빛과 그들이 고백하는 종교의 법에 따라 자기들의 삶을 형성하는데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길이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해로우며 가증스럽게 여겨져야 한다.”(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롬 1:6).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취해지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옥토를 정하시고 그곳에 씨를 뿌리셔서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게 하신다(마 13:8). 일시적으로 말씀을 받고 잠시 그것이 자라는 듯해도(히 4:4~6) 택하신 분이 끝까지 구원을 이끄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나 예외 없이 실족하고 만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지만, 말씀을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다. 축복하지만 복을 줄 수는 없다(마 10:12~15). 함께 머물도록 권할 수는 있어도, 함께 머물게 할 수는 없다(요일 2;19). 씨를 뿌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할 수는 없다(고전 3:6). ‘기쁨을 돕는 자’가 될 뿐(고후 1:24), 기쁨이 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은 아버지의 불가항력적인 이끄심에 따라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요 6:37, 44). 자기의 행실을 내세운 부자 청년은 주님을 떠났지만(마 19:22), 자기는 죄인이므로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한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눅 5:8). 부자 청년에게는 없는 소명이 어부 베드로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된다”(롬 9:11)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7) 우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해야 한다(벧후 1:1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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