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몸과 마음 치유하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의 생전 모습.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의 생전 모습.

일제강점기 우리 농촌을 지키며 헌신적인 인술을 펼쳐 ‘한국의 슈바이처’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불리는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소장:오춘영)가 일제강점기 경제수탈과 관련된 건축과 인문환경 학술조사에 착수하며 그 첫 번째 대상지역으로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마을을 지정하면서, 이 마을에서 기거하며 주민들을 돌본 이영춘 박사의 자취들도 연구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화호마을은 정읍 김제 부안을 잇는 전북의 교통요지로, 때문에 일제강점기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해 대규모 농장을 세우고 막대한 양의 쌀을 자국으로 유출하는 수탈의 현장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한 가옥과 농장 건물들이 보존되어있다.

이영춘 박사는 바로 이곳에서 농민들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했다. 안락한 생활을 포기한 채 의료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농촌으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농민들의 편이 되어주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이영춘 박사는 대구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세브란스의전에 다시 입학해 수학하는 한편 남대문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1935년 경도제국대학에서 한국인 교수의 지도를 받은 제1호 의학박사가 된 후, 전북 옥구군 개정면의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해 농민들을 위한 의술활동을 시작했다.

정읍 화호마을에 남아있는 이영춘 박사의 옛 화호자혜진료소 건물.
정읍 화호마을에 남아있는 이영춘 박사의 옛 화호자혜진료소 건물.

호남평야 곳곳을 누비며 기생충 퇴치와 전염병 예방 등 각종 보건 분야에 큰 공을 세우는 한편, 수많은 병원 학교 고아원 등을 세워 농민들의 아픔을 보듬었다. 그가 설립한 개정중앙병원은 선교기관인 씨그레이브재단의 도움으로 종합병원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들로 생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한적십자사 봉사장, 연세대 명예박사학위 등을 수여했으며, 1980년 별세한 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됐다.

화호마을에는 이영춘 박사가 머물던 가옥과 창고, 당시 사용하던 사무소와 병원 등 다수의 건물들이 남아있어 고인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그러나 보존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어 미래세대 역사교육을 위한 자료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전한다.

연구소에서는 이 박사 관련 건축물들을 포함한 화호리 일대 근대역사공간에 대한 종합학술연구를 진행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 보존관리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화호마을 부근에는 정읍 일대 최초의 교회인 매계교회, 순교자 이마태 전도사를 배출한 앵성교회, 6·25전쟁 당시 23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두암성결교회 등 기독교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갑오농민혁명 유적지들도 인근에 밀집해 있어 다양한 테마의 역사여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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