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신앙과 겨레’ 믿음과 애국 씨앗 뿌리다
서천서 ‘국권회복’ 필생의 꿈 기초 놓아 … 전주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 미쳐

한학에 조예 깊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 목사로서 살아가다가, 시대의 부름 속에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친 인물. 경재 김인전의 삶은 그렇게 요약된다.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두 가지 사건에 모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의 생애가 새삼 부각될 기회를 맞았으나 아쉽게도 큰 주목을 받지 않은 채 해를 넘기고 말았다.

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크리스천 애국지사로서 김인전의 삶을 되짚어보는 역사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보수와 진보, 태극기와 촛불 사이의 혼란기를 통과하며 참다운 애국의 길을 다시 찾아가야 할 한국교회의 활로가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서 발견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 한학자가 세운 서천 한영학교

서천 김인전공원에는 고인의 흉상과 공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서천 김인전공원에는 고인의 흉상과 공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광암천과 옥포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이 작은 동네가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이 마을에 이웃한 한산면 지현리에서 유서 깊은 김해 김씨 가문의 70대손으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잠시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서천으로 돌아온 김인전은 와초리에 자리잡고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와초리에 1906년 한영학교를, 1911년에는 완포교회를 각각 설립하며 일제가 강점한 조국을 되찾는 필생의 꿈에 기초를 놓는다.

고인이 3·1운동을 주도하던 당시 시무하던 전주서문교회 앞마당의 김인전 목사 기념비.
고인이 3·1운동을 주도하던 당시 시무하던 전주서문교회 앞마당의 김인전 목사 기념비.

와초리의 교회와 학교는 이미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졌지만 그 터전에는 김인전의 추모비가 세워져 과거 그가 이 땅에서 활약한 왕성한 행적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세운동 주도한 전주서문교회 목사

김인전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계기는 부친인 위당 김규배가 어느 영국인으로부터 건네받은 한문성경을 통해 감화된 후, 1903년 온 집안이 개종하기로 선언한 일이었다. 위당은 이후 서울로 올라가 동향인 월남 이상재와 함께 YMCA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새문안교회 장로와 경신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향인 서천 일대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는데도 공헌한다.

아들 경재 또한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사역자 훈련을 시작하는 한편, 군산 구암교회에 출석하며 영명학교 임시교사로 활동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1914년에는 전주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며, 여기서도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사역을 계속한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조형물 한가운데서 김인전 목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조형물 한가운데서 김인전 목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5년 후 일어난 3·1운동은 김인전이 뿌린 믿음과 애국의 씨앗들이 한꺼번에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서천에서는 한영학교 출신들이, 군산에서는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전주에서는 신흥과 기전의 학생들이 주도세력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특히 그해 3월 13일 발생한 전주만세운동에서 김인전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가 가르쳤던 기전학교 출신의 임영신은 서울에서 제작된 독립선언서를 받아 전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고, 김인전의 지휘 아래 동생 김가전과 서문교회 교인 최종삼 등은 기독교인들은 물론 천도교도들까지 규합해 봉기를 준비하고 군중을 동원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들러야 할 여행지는 바로 전주서문교회와 군산 구암교회이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호남 최초의 신앙공동체들인 두 교회에는 유서 깊은 교회사와 함께, 겨레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자랑스러운 역사들이 간직되어 있다.

전주서문교회 앞마당에는 당초 중화산동 다가공원 아래에 건립되었던 김인전 목사의 기념비가 옮겨져 와있고, 교회 역사관과 사료실에서는 김인전 목사의 생애와 활동상을 보여주는 여러 문서와 사진들을 살펴볼 수 있다.

국립현충원에서 다시 만나는 애국지사

서울 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인전 목사의 묘역이다.
서울 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인전 목사의 묘역이다.

전주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 조사와 탄압이 자행되자, 김인전은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해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1일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듬해 전라도 대표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그는 1922년 4월에는 오늘날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취임한다.

한편으로는 중한호조사 시사책진회 한국노병회 등 임시정부 지원단체들을 조직하고, 인성학교 교장으로 후학들을 가르치며, 대한야소교진정회 국제연명만국장로교연합회 등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로서 교육가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애썼다.

하루라도 빨리 조국 광복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불철주야 쉬지 않았던 김인전은 결국 1923년 5월 과로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세상을 떠나기에 너무 아까운 48세의 나이였다.

타국의 외국인 묘지에 쓸쓸히 묻혀있던 그의 시신은 1993년 8월이 되어서야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등 여러 동지들의 유해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앞서 1980년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의 제6전시관에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밀랍인형들 사이에서 어엿이 한 자리를 차지한 김인전의 위용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여행의 기착지는 서울시 동작구의 국립현충원이다. 현충원의 임시정부요인묘역의 10번째 묘소는 바로 김인전이 잠든 자리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오로지 신앙과 겨레만을 생각했던 한 목회자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애국’이라는 이름은 비로소 어울리는 주인공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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