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효성교회)

윤희원 목사(효성교회)
윤희원 목사(효성교회)

지금 한국교회 특히 우리 교단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차갑고 무겁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바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면서 살지만 정작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그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415총선도 끝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땅에 보수 정치는 더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사실상 국회의원들, 이 땅에서 정치하는 정치인들의 정치윤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치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와 토마스 아퀴나스(AD 1224~1274)의 행위이론과 덕과 정의의 이론에서 개인이 아닌 전체 즉 집단을 더 중요시하는 사고의 단초에서 시작했으며, 이후, 집단으로서 실재하는 존재의 공공성을 정당화하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문제는 정치윤리가 실종되고 너무나 극단으로 치우쳐 있어 균형과 화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선거전에 이미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수나 진보에게 정책이 아닌 프레임(Frame/인식의 방법)으로 대결했고 그 대결의 양상에서 보수는 크나큰 이미지의 손상을 입었다.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보수진영의 행태는 국민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여실히 표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것은 정치윤리의 실종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필자는 우리 교단의 105회 총회를 염려한다. 왜냐하면 정치에서 정치윤리가 실종되듯이 목회윤리의 실종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금번 총회는 여러 선거가 있지만 우리 총회를 3년 동안 사무를 관장하는 총무를 새롭게 선출하는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신문>(2020. 4. 21일자)에 보면 정치적 이해관계로 총무에는 K씨가 유력시되고 사무총장에는 L씨가 내정된 듯한 기사가 실렸다. 그럴 수 있다. 본래 정치란 말로 하는 것이기에 세상 정치판에서는 마타도어(Matador:흑색선전)가 난무한다. 세상 정치가 마타도어로 시작된다고 해도 교회 정치는 마타도어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쩌면 우리가 목회윤리, 신앙윤리를 상실했기에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헬라어로 프슈토스인데 즉 사기, 속임수, 거짓을 의미하는 말이다. 진실이나 진리를 알지 못하면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고, 진실과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밝혀지면 안 되기에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을 때가 참 많다.

이렇게 한번 단순화 시켜보자. <기독신문>의 보도가 거짓일까? 아니면 그런 일이 없다고 펄쩍 뛰는 자들의 반응이 거짓일까? 지금 누가 거짓을 말했는지 모른다. 다만 단순화 시켰을 때 그 거짓이 사실이 될 때 이익과 유익을 보는 쪽이 통계적으로 거짓을 말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신문>이 거짓 보도를 했을까? 아니라고 펄쩍 뛰는 자들이 거짓을 말할까? 세상 이치로는 보도가 사실이지만 아직(아직 드러나서는 안 될 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보도가 거짓이라고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런 추측성 보도는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보도는 개연성과 객관성에 근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기독신문>의 기사가 매우 잘못된 보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목사와 장로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가 전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K총무 유력설과 L사무총장 내정설이 돌고 있어도 <기독신문>의 기자들은 교단의 목사님, 장로님들이 어떤 분들인가? “그럴 리가 없다라고 믿고 좀 더 신중히 보도했어야 한다. 목회윤리를 지키고 있기에 신앙양심에 반하는 일이나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또 그런 이야기가 떠돌고 있어도 기독신문의 보도는 매우 신중했어야 했다. 그런데 1면 탑 기사로 그리고 특집 6,7,8면에 여러 각도에서 심층 분석보도를 하면서 사실화했다. 더욱 사설을 통해서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총회본부를 운영하려는 발상은 속히 멈춰야 한다고 평하였다.

이제는 누가 거짓을 이야기했는지 논할 필요가 없다. 내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기독신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바로 인터넷 기사를 내렸고, 발끈해서 <기독신문> 폐간을 헌의하자고 한 주장도 주춤하여 탄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있는 일인데도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필자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왜냐하면, 목회윤리 실종의 민낯을 여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목사에게 목회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목회 자체를 쉽게 교단의 정치적인 일들을 하려고 포기하거나 또는 방임하고 있다면 그게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와 총무, 사무총장의 일을 병행하도록 했지만, 목사에게 목회처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을 그렇게 하려고 하니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목회자에게 있어야 할 목회윤리의 실종으로 본질의 목회보다 비 본질의 목회를 더 소중히, 성공으로 여기는 우리들의 민낯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정치가뿐만 아니라 기업가에게도 기업윤리의 상실은 이윤추구에만 매달리게 하듯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목회윤리 상실은 목회의 본질보다도 비본질에 매달리게 한다. 기업가에게 기업윤리란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해서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고 힘에 버거운 일이지만 당장 손해가 되고 불이익이 되어도 올바른 경영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도덕적윤리적으로도 투자자 중심이 아닌 소비자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기업윤리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1982829일 새벽에 시카고에서 12살짜리 소녀 베리 켈리반을 필두로 애덤스 제이너스와 그의 남동생 스탠리 제이너스와 그의 아내 테레사, 플라프린스, 베리 맥달랜드, 베리 라이너는 7명 모두 다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타이레놀을 검사해 보니 청산가리(시안화카륨)가 정제되지 않은 채 주입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시카고 전역에 경찰은 확성기를 들고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시 타이레놀 제조사인 <존슨 엔드 존슨>은 제임스 버크가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기업윤리에 맞게 소비자 보호 정책을 펴고 소비자 먼저 투자자 나중이라는 원칙을 세워 막대한 손실이 나도 소비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견지했다. 그는 즉시 타이레놀 생산과 광고를 중단하고 미국 연방 수사국과 식품의약국이 독극물이 함유된 제품에 대해서만 회수하도록 조치했는데도 버크는 전국의 타이레놀 캡슐을 빠짐없이 회수하여 사들였다. 즉 소비가격으로 회수하여 약 1억 달러를 회수비용으로 지출했다.

이러한 제임스 버크의 결정은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었지만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회사의 주력 제품을 수렁에서 건졌을 뿐만 아니라 예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기업가는 자사의 이익보다 사회의 유익을 더 생각해야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결정이었다. 회사란 결국 사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가운데서만 이익을 창출해야 됨을 분명히 한 아주 귀한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의지, 곧 자유 의지를 주셨다.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린 이 자유의지의 결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극히 드물다. 늘 내 욕심과 이익, 유익을 도모하며 채우는 일을 선택할 때가 많다.

금번 105회 총회에 선출해야 할 총무는 우리 교단의 장래와 한국사회의 건강함을 드러내야 할 도덕적이고 신앙과 윤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선출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가 내렸던 씁쓸한 결정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 속에서 선택을 잘못하면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신문>의 보도는 사실 여부의 진위성을 떠나서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고 또 경계심을 가지게 한 기획 보도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론의 사명은 공정 보도에 있고, 이 공정 보도는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자 하는 본능을 바르게 충족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의 저자인 빌 코바치, 톰 로렌스 틸은 10개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중에 2번째의 원칙은 저널리즘의 최우선적인 충성 대상은 시민들이라고 하였다. 언론의 공정 보도의 사명이 시민을 위해서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신문>의 보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교단의 성도들에게 공정 보도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공정 보도는 5번째의 원칙인 기자들은 반드시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감시자로 봉사해야 한다라고 하여 공정 보도는 권력, 다시 말해 교권의 감시자가 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결국 이 공정 보도는 9번째 원칙인 기자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양심을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언론의 사명인 공정 보도는 기자 개개인의 양심에 반하는 기사로는 이루어지지 아니함을 알 수 있게 했다.

이런 점에서 기자의 양심은 사회 속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언론의 사명을 완수하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다라는 말은 지켜야 한다. <기독신문>의 보도가 기자들의 양심에 반하지 않는 기사였다면 우리는 그들을 지켜주어야 한다. 단지 교단의 교권을 쥐고 흔드는 자들을 기자들이 쥐락펴락하기 위해서 공정 보도의 양심을 저버리고 쓴 의도성의 기사라면 그 기자는 스스로 사직해야 한다.

한 기업가가 기업윤리를 지켜냄으로써 회사와 사회를 살려냈듯이 목회자로서, 목회윤리와 성도로서 신앙윤리를 지켜냄으로 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는 목회윤리를 지키고 성도는 신앙윤리를 지키며, 신문의 공정한 보도는 내압과 외압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정치, 기업, 목회의 윤리도 다 양심에 반하지 아니함으로 지켜진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라고 가르쳤음을 안다면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야말로 믿음을 떠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삶의 현장에서 목사로서 목회윤리를 지켜내고, 성도로서 신앙윤리를 지켜내자. 그래야 공정하고 투명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윤리의 실종은 거짓과 억지만 난무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데이비드 웰스는 <윤리실종> 책에서 객관적인 옮음과 그름을 거의 믿지 않는 문명이 분명히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는 윤리의 방향타를 빼앗긴 채 어둠 속을 더듬으며 나아간다라고 말한다. 지금 나는 우리의 결정과 선택이 목회윤리의 실종에서 비롯되지 않기를, 그리고 신문보도가 공정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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