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을 요한복음에 기록하면서 제자들 각자의 성격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였다. 그중 빌립과 나다나엘에 대해 살펴보자. 빌립은 예수의 부름을 받은 후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했다. 이것을 보면 빌립의 성격이 적극적이고, 나다나엘과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니, 빌립은 나사렛 예수에 관해 부연해 설명하는 대신 ‘와서 보라’고 간단명료하지만 강하게 동기부여를 했다. 나다나엘은 곧바로 행동에 옮겨 예수를 만나러 갔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자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솔직함을 칭찬하셨다. 이 대목에서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처럼, 사람마다 누구의 조언을 듣느냐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운다.
나다나엘이 했던 말은 지금 같으면 비록 사실일지라도 ‘나사렛 사람’을 비하한 것이므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소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간사함이 없다’라고 오히려 칭찬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음에도 없는 간사한 말(거짓)로 자신을 칭송하는 말을 듣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나다나엘처럼 자신에 대해 전혀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정직)을 좋아하셨다.(참고 요1:43~51)
‘간사함이 없다’라는 단어에는 ‘가면을 벗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진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가짜 얼굴인 가면을 쓰는 우리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배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선하고 착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 삶의 규범들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규범은 자유를 촘촘히 얽어매고, 어길 경우 사회적 신분과 명예를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 가면’을 쓰는 간사한 사람이 된다.
그들은 착하고 정의로운 척하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간사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손톱만한 잘못만 보아도 정죄하고 나선다. 남을 비난하면서, 자기는 의인이 되는 소위 ‘에스컬레이터 효과’를 활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문을 열어주시길 정말로 기대한다면, 거룩함의 가면을 과감하게 벗는 회개가 필요하다.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회개이고, 회개의 동의어는 은혜이다. 회개는 위선의 가면을 벗고, 마치 탕자인 둘째 아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왔듯이 내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자를 향해 ‘내게로 오라’로 초청하시면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쉼’(마 11:28)과 ‘평안’(요 14:27)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쉼과 평안을 받기 위해, 나다나엘처럼 간사함이 없는 자로 주님 앞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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