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임을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다. 이유도 없이 막연히 싫을 수 있다는 것도 지적했다. 싫고 좋음에 꼭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싫어할 이유가 없는 사람, 더욱이 좋아하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임에도 싫어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대부분은 잘못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정보는 다양하게 들어온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군가가 고의적 또는 악의적이거나, 오해로 인해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접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널리 퍼지는 일은 꽤 많다. 그런 좋지 않은 소문은 확산속도 역시 빠르기 마련이다. 전파에 기여하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다. ‘퍼나르기’가 어렵지 않은 시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보를 접하는 순간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된 정보 확산의 단말기 역할을 하는 휴대전화기를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일일이 같은 말을 전하기 귀찮으면 단체문자로 확 질러버리기도 한다. 돈이든 시간이든 비용이 없거나 저렴하다. 뒤늦게 주워 담으려 하니 이미 전파속도를 따르지 못한 회수능력이 아쉽다. 후회해도 이미 내 손은 떠났을 뿐 아니라 유행하는 바이러스처럼 어떤 형태로 변이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늘 면역력을 생각한다. 허튼 소리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억제력 말이다. 그것은 고의적인 가짜뉴스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걸러낼 수 있는 필터링 기능이다. 어떤 말을 들어도 팩트체크를 거치지 않는 한 흔들리지 않는다. 든든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귀가 얇다고 표현되는 필터링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오래 전에 난 다짐했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한 어떤 정보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지금 섬기는 교회에 부임하고 나니 원하지 않는데도 누군가는 교회 내의 인물 정보를 주려고 애썼다. 일부러 외면했다. 정중히 거절하거나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가 직접 알아가겠다고 했다. 26년 전 일이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인 듯싶다. 더하여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 하나, 나를 싫어하게 만든 그는 그래도 나를 보면 밝게 웃어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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