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러 갔다가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제자들과 아침식사를 하셨다. 그 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그러기를 세 번이나 하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요 21:15~19)

마가복음에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시몬과 안드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고 기록되어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왜 전혀 맞지 않게 양을 치는 목자의 사명을 어부 출신 베드로에게 주셨을까?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실망한 채 고향으로 와서는 과거 본업인 어부로 돌아갔지만,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허탈감에 빠진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려고 그랬을까?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18척 크기의 청새치를 잡는다. 그런데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항구로 돌아오다가 상어 떼를 만난다. 사투를 벌이는 산티아고는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라고 소리를 지른다.

새벽녘에 항구에 도착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청새치를 본 산티아고처럼, 새벽녘에 항구에 도착한 베드로에게 또한 아무 것도 없었다. 산티아고가 천신만고 끝에 잡았던 그 청새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닌 결과 역시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일까?

헤밍웨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멸(destroy/물질적 가치)과 패배(defeat/정신적 가치)로 구분해 설명하였다. 산티아고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 결코 허무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으라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숙제를 남기었다.

밤새 고기를 잡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부활의 주님을 세 번째로 만나게 된다. 식사를 준비하신 주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마치 항구에 도착한 산티아고가 그날 밤 편안히 잠들 수 있었던 것처럼, 피곤함과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에게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이 임했다. 그들은 조반을 들면서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허무라는 더 큰 문제가 해결되는 새로운 인생의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베드로를 사랑하사 새로운 인생의 비전인 목자의 사명을 부여하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나 역시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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