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십자가, 변화시키는 능력(롬 5:8)
[이 주일의 설교] 십자가, 변화시키는 능력(롬 5:8)
  • 김병국
  • 승인 2020.03.24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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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패배 같던 십자가 통해 들려주시는 승리의 음성 들으세요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애리조나호의 충격

하와이 진주만에 가면 미국의 태평양 함대사령부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크고 작은 군함들이 정박해 있습니다. 그 군함들 가운데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색적인 군함 한 척이 있습니다. 바로 ‘애리조나호’입니다. 이 군함은 위풍당당하게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처참한 모습으로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 군함이 침몰한 날짜는 1941년 12월 7일 고요한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450대의 일본군 폭격기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은 애리조나호는 8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군함에 타고 있던 1177명의 젊은 병사들도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신이 인양된 병사는 겨우 72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 국민들과, 시신조차도 인양하지 못한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그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결국 애리조나호는 충격과 슬픔과 수치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그 군함을 즉각 인양해서 폐기하는 대신에 도리어 그 위에 기념관을 세우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젊은 병사들의 죽음과 희생을 잊지 않고 애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처참하게 침몰한 군함을 통하여 ‘무언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충격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 애리조나호와 같이 충격과 슬픔과 수치를 안겨주는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노량해전에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일곱 가지의 말씀을 남기신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을 죽일 때에는 일반적으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범죄자가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바로 무덤에 장사를 하지 않고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서 나무에 달린 사람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평생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나무로 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로마법이 생각났기 때문에 십자가가 부끄러웠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어찜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물었던 이유는,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형은 아무에게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사형 형틀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가장 오래 동안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이나, 도망친 노예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흉악범 중의 흉악범만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생각할 때 십자가가 부끄러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을 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엄청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분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권세가 있는 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회당장 야이로 사건과 나사로 사건을 통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임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말씀 한마디로 열두 군단보다도 더 많은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분임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대제사장 앞에 힘없이 끌려 가셨습니다. 로마 군인들과 제대로 맞짱 한 번 뜨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음성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십자가의 사건을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도할 때마다 십자가 사건 중심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 중심에도 십자가가 있었고, 찬양의 중심에도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십자가를 도리어 자랑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구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사람의 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보다도 더 믿기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같은 죄인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거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도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음성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예수님의 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도 아니고, 가룟 유다의 배신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단번에 사하여 진 줄 믿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는 그 순간 용서받게 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음성은 “나를 따라 오너라”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가용을 타고 편안하게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초청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하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은 패배의 길처럼 보이지만 승리의 길이었고, 수치의 길처럼 보이지만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충격과 슬픔과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도리어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전파하였던 이유는 십자가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네 죄 사함을 받았노라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올해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듣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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