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성 장로(안동옥동교회)

권택성 장로(안동옥동교회)
권택성 장로(안동옥동교회)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볼 때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자연스럽게 찬양할 때가 있습니다. 장엄한 폭포 앞에서, 신비한 자연경관과 장엄한 대협곡에 압도되어 놀라기도 하지만 때론 환호와 복받친 울음을 울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탄성을 잘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입니다. 그가 연행사인 부마 박명원의 비공식 수행원이 되어 중국 여행을 하던 도중 만난 요동벌에서 일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일행과 함께 삼류하를 건너 냉정에서 조반을 먹고 10리 남짓 거리의 산모퉁이를 돌아 평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산해관까지 1200리 어간에 한 점 티 없이 펼쳐진 광야에 그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어서 동행 정진사에게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라 했습니다.

‘아니, 울 만한 터라니?’ 이해할 수 없었던 정진사가 그 연유를 묻게 되고 그는 장광설을 토로합니다. 그 유명한 호곡장론(號哭場論)의 탄생 현장입니다. 이 장광설의 근저에 갓난아이의 울음이 전제됩니다. 호곡장론은 열하일기의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이후 추사 김정희의 시에도 인용되었고, 이육사의 <광야>에서, 윤동주의 <참회록>과 <십자가>에서 찬연한 꽃을 피웁니다.

성경에서도 잘 울었던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있고, 자신의 목숨과 관련해서 울었던 히스기야 왕이 있습니다. 잘 울었던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 다윗도 놓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가 울었던 이유 중에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회개를 위해 베갯잇을 적시도록 울었던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TO)가 세계적 전염병의 대유행을 알리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 코로나19는 이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확진자가 줄어들고 있지만 유럽의 경우 확진자와 사망자가 확산 일로에 놓여 있습니다.

필자는 최근 누가복음 13장 4~5절을 묵상했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말씀을 보던 그날 전국적으로 사망자 열여덟 사람이 나왔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어떤 이는 신천지, 또 어떤 이는 정치권에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남 탓만 하므로 온 나라가 깊은 혼란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때에 필자는 제 죄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보다 세속적인 명예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줄을 대고, 때론 진영논리에 빠져 정치적 분열에 동조했으며, 상대방을 시기하고 미워했음을 회개하며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총회 두이레 아침금식기도회를 마치고 첫 아침식사를 하려고 앉았을 때에도 눈물이 앞을 가려 숟가락을 들지 못했습니다. 필자는 현재 코로나19 환자가 가장 많은 대구·경북지역의 장로회 회장으로서 그동안 하나님 앞에 진정성 있는 회개도 없었고, 기도도 게을렀으며, 그저 내 자랑만 일삼았던 모든 죄가 떠올랐습니다. 책임을 통감하며 영주 갈분기도원 뒷산 정상에 올라 주님 앞에 눈물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조동하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 너도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시처럼 나 하나 회개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이육사의 <광야>에서 목 놓아 울었던 울음과 같이, 윤동주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참회하는 시인의 통곡처럼, 예수님의 꽃처럼 붉은 피를 조용히 흘릴 수 있는 헌신의 울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울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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