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애통의 골짜기에도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5)

우편배달부의 애통

얼마 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감동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레터스 투 갓(Letters To God)>이라는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아암을 앓고 있는 8살짜리 꼬마 ‘타일러’ 입니다. 그 꼬마가 무시무시한 병마와 싸우는 가운데서도 가장 큰 기쁨이 되었던 일은 매일 하나님께 편지를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꼬마가 쓴 편지 때문에 입장이 난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배달해야 하는 우편배달부 ‘브랜디’였습니다.

그는 매일 술에 젖어 지각과 결근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조차도 까칠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는 자기 집 앞에서 차를 후진하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치어 죽이는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실수로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가지 않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 사건 이후로 우편배달부는 슬픔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고, 울음을 참고 싶어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도 이혼을 했습니다. 이러한 구제불능의 우편배달부를 하나님께서는 주인공 꼬마가 쓴 편지를 통해 위로해 주셨습니다.

 

성경인물들의 애통

이처럼 사람이 당하는 슬픔 가운데서 도저히 감출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는 최고의 슬픔을 가리켜서 한 단어로 ‘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욥’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욥은 사탄이 주는 고난 때문에 그렇게 많던 소와 양과 낙타를 다 잃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순간에 열 명의 자녀를 모두 다 잃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건강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저주하였습니다. 결국 욥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욥은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애통하는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역했던 시기가 바로 남유다 왕국이 B.C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앞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인에게 훼파되는 모습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학살을 당하거나 짐승처럼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48~49절에 보면,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로 애통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 다니는 천사처럼 거룩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끄러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죄가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간음죄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행동을 책망하기 전까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을 정도로 영적으로 우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하였을 때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영적인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큰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2편 3절~4절을 보면,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을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애통

애통의 눈물은 특별한 고난이나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주변을 둘러보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청년들을 ‘7(칠)포세대’라고 하는데요, 연애와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부모들은 애통하고 있습니다. 치매에 걸려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도 애통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난 가장들도 애통하고 있습니다. 배우자의 외도로 애통하는 이도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극심한 불경기로 가게 문을 열지 못하는 상인들도 애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쌍하게 여깁니다. 반대로 만사형통한 사람, 꿈과 소원을 다 이룬 사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을 볼 때마다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하여 과연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지, 그 기준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마태복음 5장 4절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

예수님은 만사가 형통하지 못하여 애통하는 자, 꿈과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애통하는 자, 그리고 죄를 짓고 애통하는 자가 진짜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위로는 누구의 위로를 가리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흔히들 애통 골짜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눈물과 탄식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는 세상이 주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욥을 보시기 바랍니다. 원치 않는 고난으로 인하여 애통의 골짜기까지 내려갔지만 그 곳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욥기 42장 5절에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함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애통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놀라운 장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의 계획이 아니라 평안의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주시는 위로

본문의 다윗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애통의 골짜기로 내려갔을 때에 누가 그 곳에 계셨습니까? 5절에 보면, 다윗의 더러운 허물과 무거운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고 할지라도 양털과 같게 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결국 애통의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저주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애통하고 계십니까? 실패 때문입니까? 질병 때문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자식 때문입니까? 배우자 때문입니까? 더러운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서 있는 애통의 골짜기를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골짜기 같지만 그곳에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애통을 십자가 위에서 이미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셔서 그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위로를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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