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수(총신대신대원)

박용규 교수(총신대신대원)
박용규 교수(총신대신대원)

1884년 9월 20일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입국한 이래 지난 135년 동안 한국교회는 우리 민족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놀라운 선물을 선사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성경번역위원회를 발족하여 사장된 한글을 민족 민중의 언어로 끌어올리고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 신앙을 통해 내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기독교신앙과 정신은 물론 서양교육과 서양의학을 한국에 도입하고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참된 애국애족운동, 그리고 사회계몽운동에 앞장선 세력도 한국교회였다. 이 모든 것 중에서도 1919년 3·1운동은 한국교회가 우리 민족에게 제공한 가장 위대한 선물이었다. 전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중심 세력은 한국개신교인들이었고, 그 중에 장로교인이 가장 많았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 16명 가운데 장로교인이 7명, 북감리교 6명, 남감리교 3명으로 장로교인이 가장 많았다. 이들 일곱 명은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승훈, 이명룡, 이갑성이며, 이 중에서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고, 이승훈은 졸업은 하지 못했으나 2년 동안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한 사람이 5명이나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장로교는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개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1회 만세 시위를 주도한 중심세력도 장로교였다. 1919년 총회장 김선두 목사는 투옥 중이라 제8회 장로교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총회록에는 얼마나 많은 총회 소속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이 피해를 입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1만9525명 중에서 장로교인이 2486명으로 가장 많았다.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축이 된 대한애국부인회는 배후에서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장로교는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일에 늘 앞장섰다. 그 결과 교회가 겨레와 함께하는 종교, 겨레의 아픔에 뛰어드는 종교라는 인식이 백성들의 심령에 깊이 새겨졌다. 한국장로교는 평양대부흥운동과 3·1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이 민족의 진정한 영적각성의 원천이라면 3·1운동은 이민족의 진정한 자유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원천이었다. 1969년 프랑크 발드윈이 콜롬비아대학 철학박사학위 논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질서와 분단의 비극적인 시기에 3·1운동은 협동, 비이기심, 그리고 통일이라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3·1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화려한 기념행사에 있지 않다. 100주년이 지나고 101주년을 맞는 지금부터 개인과 교회가 진정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별히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해 온 세계가 위기를 만나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절감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며 겸손히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와 한국교회 그리고 온 백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했던 지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교회를 다시 살리시고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했던 그 아름다운 과거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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