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한국명 배위량)는 1862년 스코틀란드계 미국인으로 아리조나 주에서 태어났다. 1890년 애니(Annie Laurie Adams, 한국명 안애리)와 결혼한다.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해 1893년 6월 4일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영서현교회를 시작한다.

1910년 3월 13일 호주장로교회와 협의를 통해 호주선교사가 개척한 초량교회를 영서현교회와 통합하기로 합의한다. 1893년 맥켄지 선교사가 구입했던 대지 위에 1923년 교회 건축을 끝내고 입당한 뒤 이름을 초량삼일교회라 고쳐 부른다. 삼일독립만세운동을 뜻하는 교회 이름처럼 경상도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1952년 초량교회와 삼일교회로 분립한다. 이처럼 한강 이남 첫 교회 초량교회는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양화진선교사묘역에 있는 베어드 선교사 부자의 묘소.
양화진선교사묘역에 있는 베어드 선교사 부자의 묘소.

1896년 11월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베어드에게 교육 사업을 맡기고 한양으로 불러올린다. 남장로교와 연합교육사업을 추진할 인물로도 베어드가 적임자였다. 한양으로 올라간 베어드는 곤당골에 사랑방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조선말로 가르치는 토착화된 학교다. 1897년 베어드 부부는 선교본부의 임무 조정 결의에 따라 교육 사업을 조직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난다. 1900년 숭실학당(숭실중학)을 개교한다. 유망하지만 가난 때문에 공부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학교 부설로 공작부를 두었다. 공작부에서 반나절 일하고 학교에서 숙식하며 공부했다. 1906년 베어드는 숭실전문(숭실대학)을 개교한다. 감리교회와 연합해서 펼친 교육 사업이다. 드디어 초교파 연합 교육 사업을 성취한 것이다. 이로써 베어드는 불과 10년 만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기독교 교육체제를 처음으로 완성한다.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조선교회를 탄압한다. 105인 사건이다. 일제가 조작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 베어드는 숭실대학 교장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조선에 묻히겠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고 말했다. 1931년 11월 28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숭실대학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3000명도 넘는 조선인이 운집하여 이별을 애도한다. 베어드 선교사의 평양 숭실대학 구내 묘비만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다시 세운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가 부산에 도착한 이듬해에 첫 딸 낸시 로즈를 낳았다. 1894년 5월 13일 뇌수막염으로 먼저 떠나보낸다.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찬송시로 쓴다. <멀리 멀리 갔더니>는 한국찬송가(387장)로 남았다. 슬픔도 잠시 그 해 10월 12일 첫 아들 존을 낳았다. 1897년 한양에서 낳은 아들 베어드 2세는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898년 평양에서 낳은 리차드 베어드는 강계에서 성경학교 교장으로 헌신했고 광복 후 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 총무로 봉직했다. 베어드 2세는 1987년, 리차드는 1995년 각각 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다. 베어드 가문 2대는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남아 영원히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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