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값없이 주신 놀라운 보혈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 찬송합시다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알 사범

바둑에 문외한이라 오목이나 알까기 게임을 제외하고는 바둑판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생전 처음으로 바둑중계를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서울역 맞이방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계시던 분들도 저와 같이 채널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이세돌 9단과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의 세기적인 대국이 생방송으로 중계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아무리 알파고가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세계 최고 실력의 프로기사를 절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알파고의 바둑실력을 본 전문가들은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파고를 ‘알 사범’, ‘알10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를 보면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새롭게 출시되는 스마트폰의 놀라운 기능을 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냅니다. 만약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를 알약 하나로 완치할 수 있는 신약을 누가 개발한다면 기립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기계의 능력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능력에 대하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위대하고 놀라운 최고의 능력은 과연 어떤 능력일까요?

 

최고의 능력

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십자가는 원래 고대 카르타고에서 죄수를 죽일 때에 사용하던 사형 형틀이었습니다. 이 형틀을 도입한 로마제국은 사형수 가운데서도, 특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자나 극악한 범죄자를 죽일 때 사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에는 먼저 심한 채찍질과 매질을 한 다음,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러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충격적인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말도 되지 않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들이 볼 때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크신 능력이고, 홍해를 가르신 놀라운 능력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서 그 어떤 사건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능력입니다.

중간박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말도 되지 않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들이 볼 때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려가지 않는 계량기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 바로 옆에 전기계량기가 붙어 있습니다. 몸무게를 재는 체중계의 숫자는 한동안 같은 숫자에 머물 때도 있고, 가끔씩은 거꾸로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계량기의 숫자는 절대로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항상 올라만 갑니다. 아무리 초절전형 냉장고를 사용해도, 심지어 조그마한 전등 하나를 잠시 켰다가 꺼도 올라갑니다. 특히 에어컨을 사용하는 여름철에는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여름철 전기계량기 못지않게 일 년 내내 빠른 속도로 올라만 가는 계량기가 있습니다. 혹시 무슨 계량기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죄의 계량기입니다. 전기계량기는 한 가정에 한 대이지만, 죄의 계량기는 개인당 한 대씩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계량기는 언제 올라갈까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마다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면 올라갑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준이나 과녁은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삶을 가리켜서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거나 시기를 하여도 죄의 계량기는 올라갑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험담하는 말을 하여도 올라갑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지 못해도 올라갑니다. 심지어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도 올라갑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 죄의 양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도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다”(시 40:12)

 

죄의 값, 사망

량기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량기의 숫자는 숫자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계량기를 비롯한 어떤 계량기든지 숫자만큼 반드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의 계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전기세나 수도세처럼 우리에게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자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통범칙금처럼 벌금 몇 만원 정도가 아닙니다. 징역 몇 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망이란 단순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다가 죽어서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사망입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합니다만 죄의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죄의 숫자는 점점 더 높아지고, 죄의 값은 더 커질 것입니다.

 

청구금액 ‘제로’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아무리 많은 허물과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죄의 계량기 숫자가 아무리 높더라도 ‘0(제로)’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0%나 20%를 깎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100%를 다 깎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구서에 적힌 청구금액이 ‘제로’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중간박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누구를 버리셨습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워낙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못 본 척하거나,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적당하게 봐 주셨기 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 담당시켰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누구를 버리셨습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지옥 형벌을 내리시는 대신에 누구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리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들 중에 남다른 선행이나 업적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크고 귀한 놀라운 보혈의 능력과 은혜를 늘 찬송하며 살아가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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