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사람에게는 살려는 본능이 있다.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단계설에 의하면 그것은 안전에 대한 욕구로 2단계에 해당된다. 사람은 죽을 위험에 빠지면 이 본능이 깨어나며 평소에 볼 수 없던 놀라운 힘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고귀한 존재이기에 본능만으로 살지 않는다. 그래서 본능의 다른 한 편에서는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아름다운 본성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이다. 단지 이것이 잘 드러나지 않거나 항상 우선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바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건강한 삶을 키워가다 보면 살려는 본능보다, 살리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이 더 발달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이 나의 본능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나는 지금 목회자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자긍심이 크다. 더욱이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께서 섬기던 산정현교회를 섬긴다는 것이 더욱 그렇다. 그런 내가 지금 살기 위해 목회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리기 위해 목회하는 것인지 물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교회를 살리기 위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난 나 살자고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주님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죽음에 갇힌 나를 살리기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사는 길이 아닌 살리기 위한 죽음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그런 주님 덕에 숨쉬는 내가 또 살기 위해 버둥거리고, 살기 위해 분주하면서도 마치 살리기 위한 존재인 양 높은 자리에 서서 고귀한 모습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살리는 삶을 살 때 비로소 나도 산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살려고만 버둥거리면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나 살기 위해 살아 있는 누군가를 죽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은 많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살리는 역할을 해야 결국 나도 살고 교회도 그리고 이 세상도 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늘 살려고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주님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주님께 눈을 맞추기도 힘들어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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