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식 목사(목동 영성교회)

소통 단절 시대에도 하나님은 경건한 모든 자를 받으십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최효식 목사(목동 영성교회)
최효식 목사(목동 영성교회)

지금은 소통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감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현대인들 대부분은 SNS 앱을 사용하면서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SNS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바꿔 놓았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소통을 보면 직접 전화통화나 대화보다 단체대화방에서 업무를 토론하고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일반화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방식은 다양한 견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 ‘끼리끼리’ 문화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공감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공감을 통해 생각이 다른 부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계를 보입니다. 취미나 오락은 물론 정치적인 성향까지 비슷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보를 공유하는 그룹은, 그렇지 못한 그룹과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팬덤현상’입니다.

‘팬덤(fandom)’은 ‘열광자’, ‘광신자’라는 뜻의 ‘팬나틱’과 ‘세력’을 뜻하는 ‘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팬덤의 의미는 ‘세력을 이룬 팬들의 집합이나 행동’ 정도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가수나 배우, 운동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팬카페에서 유래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세력이 되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열광을 받는 BTS도 ‘아미’라는 팬클럽의 활동이 큰 몫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까지 ‘묻지마 지지 세력’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1인 미디어들의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이나, 어느 회사가 만들면 무조건 명품이라든가,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무조건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주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팬덤현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은 아예 듣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른 말,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면 일단 거부하거나 틀렸다고 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적대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적대적 관계는 원수 갚음, 복수, 보복과 같은 방식의 행동을 야기시킵니다.

첫째, 소통 단절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살았던 시대는 로마제국이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무력으로 그 땅을 다스리고 있는 정복자입니다. 반대로 베드로는 빼앗긴 땅에서 태어나 정치적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유대인인 베드로는 신앙적으로 로마인들과 달리 선민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배려할 수 있는 위치가 결코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고넬료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5) 성경은 고넬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이 설명으로만 보면 고넬료는 신앙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고넬료에게는 아직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고넬료에게 유대인인 시몬이라는 낯선 사람을 청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가 받은 도전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거나 평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머리 아픈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미치지 못하는 정의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내적 평안을 주는 정도의 신앙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인 고넬료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몬을 청하라.” 이것은 ‘명령하여 불러와 얘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청해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훌륭한 모습은 자신의 지위와 형편에 맞는 생각과 결정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십니다. 식사시간이 되어 뭔가 먹고자 할 때 하늘에서 네 귀가 묶인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어라”(13절)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14절)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이런 대화가 세 번 반복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묘합니다. 고넬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고넬료을 받아들이도록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고넬료와 베드로는 서로 소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고넬료와 베드로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안 돼. 그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어. 그 사람은 내가 말을 걸어도 듣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은 국적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잖아.”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은 많습니다. 소통되지 않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되지 않는 이유가 내게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가고, 하나님이 만나게 하는 사람을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만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관계 속에서 일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 19~20절입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는 이 장면을 묵상해보면, 상대에 대한 거부감이 고넬료보다 베드로에게 더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넬료는 말하던 천사가 떠나자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냅니다. 곧바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더 상세한 말들로 설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 입장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20절) 베드로는 이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성과 지혜와 지식으로 생각하면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고넬료와 상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갑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동족을 배신하는 심각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나도 알고, 너희도 안다고 합니다.(28절) 더군다나 베드로는 지금 유대주의자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한다고 핍박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또한 전쟁을 통해서라도 몰아내야 할 군대 지휘관을 만나는 것은 유대의 열심당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베드로를 맞이하는 고넬료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절) 지금 고넬료는 정복자인 군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맞이하는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지위도 없고, 권세도 없고, 국경도 없습니다. 아무런 제약이나 장벽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더 인상적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절)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갑을관계도 아니고 상하관계는 더욱 아닙니다. 차별이 없는 ‘사람’으로 만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를 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 ‘죄인’이라는 동등한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만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면서 상하를 두지 않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형제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합니다. 베드로는 세례를 베풀고 이 일을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합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할례자들로부터 받은 비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넬료와의 만남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유효하다는 반증이 되어 빠르게 복음이 확산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의 장애를 만들지는 않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민의식 때문에, 우리의 편견 때문에, 불신자들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면 먼저 우리의 시각을 고쳐야 합니다. 외모나 지위나 재산을 보며 차별하며 편견을 갖기 좋아하고,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며 편을 가르는 팬덤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은 다 받으신다는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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