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초갈등’ 중이다.

물론 갈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갈등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모든 것이 좋게만 느껴지면 안주한다. 스스로 갈등하며 내가 발전했고, 사회적 갈등이 세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의 초갈등은 창조적이지 않은 ‘소모적 파괴’로 치닫는다. ‘너 죽고 나 살자’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아플까? 그 이유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를 친일과 항일로 갈랐다. 지금도 누구든 친일로 매도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는 듯하다. 전쟁을 치르면서는 더 깊은 이념적 갈등사회로 가버렸다. 좌우로 극명하게 나뉘더니 그 긴 세월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보수와 진보 또는 좌와 우 정도가 아니다. 친북을 넘어 ‘종북’이나 ‘좌빨’ 등의 극한 표현으로 매도되거나 아니면 극우집단으로 치부하며 서로를 밀어낸다. 나와 다른 누구와도 타협이나 수용 등의 정치를 하지 못한다. 다른 상대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정치일진대 그런 정치는 이미 없다. 함께 죽는 길로 가고 있다.

서로 다름에 대한 수용과 설득으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교회도 초갈등 중이다. 다른 의견에 대한 경청, 그 속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하며 빠르게 붕괴로 치달으니 답답하다.

적절한 갈등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역사학자 A. J. 토인비는 그것을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했고 그 도전이라는 것이 ‘중용’ 즉 적절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초갈등은 중용이 아니다. 토인비에게 있어 그것은 멸망을 재촉하는 요인일 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라는 등식에 갇힌 채, 매우 다른 우리를 사랑으로 품으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듣고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생각도 읽어야 한다. 글이나 말이 아닌 생각과 가치도 읽고 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우리 사회는 집단적 ‘난독증’과 ‘난청’으로 소통의 벽에 부딪힌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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