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대장 김창수>, 젊은 시절의 백범 김구 선생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1896년,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본인을 죽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교도소에 갇힌 김창수. 그는 수감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재소자들의 의식을 깨우다가 소장에게 핍박을 당한다. 친일적 교도소장은 김창수에게 ‘그냥 할 수 있는 것이나 하며 살라’며 그의 의지를 꺾으려 한다. 그러나 김창수는 단호했다. ‘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만 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은 내 능력이나 취향의 범주에 갇히기 마련인데. 내 능력을 벗어난다 싶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고, 별 관심이 없을 때로 뒷걸음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과 열망이 있을 때는 아무리 힘겨워도 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문명은 발전하고 역사의 흐름도 바뀌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견인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능력’과 관련된다면 ‘해야 할 일’은 ‘사명’에 맞닿는다. 역사적 사명일 때는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기에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해낸 사람들이 고맙다. 그들이 특별했거나 가진 것이 남달라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사명’을 가지니 숨어있던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김창수는 사형수로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중에 결국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것은 살아야 할 이유를 확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을 깨달은 그는 탈옥했다. 이름도 바꿔 ‘김구’로 살았고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는 생각 자체가 감옥이리라. 나를 가두는 것은 누군가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제한하는 순간, 그 한계라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새해의 첫걸음을 막 땐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해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이란 무한 반복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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