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제주 육군훈련소 예배당으로 건축된 강병대교회당.
한국전쟁 당시 제주 육군훈련소 예배당으로 건축된 강병대교회당.

제주도 남쪽 모슬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특별한 예배당 하나가 있다. 뭍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중, 국군 공병대가 건축한 이 예배당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받았다. 바로 강병대교회당이다.

‘강한 군대를 키워낸다’라는 뜻을 가진 강병대교회라는 이름은 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운영되던 육군훈련소의 이름 ‘강병대(强兵臺)’에서 따왔다. 1952년 1월 제9대 훈련소장으로 취임한 장도영 장군은 신앙을 통해 장병들의 전력을 극대화하려는 구상을 했고, 이에 따라 그의 지시로 그해 5월 예배당 착공이 이루어졌다.

강병대교회가 세워진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제주도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사연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을 통해 한반도를 집어삼킨 후에도 일제는 계속해서 대륙진출의 야욕에 골몰했다. 그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본토 외의 지역에 새로운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일이 필요했다. 결국 제주가 희생양이 되어 섬 곳곳이 파헤쳐지고 훼손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고, 그들이 남기고 간 여러 군사시설들은 고스란히 미군, 그리고 미군정이 끝난 후에는 국군의 차지가 됐다. 한국전쟁 발발 전후로는 제주도가 피난처이자 후방기지가 되면서, 그 자리에 신병훈련소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오래되어 낡은 설비들은 장병들이 3주간의 고된 훈련을 치르기에 충분치 못했다. 훈련병들은 생소한 환경에서 훈련을 받으며 질병과 굶주림까지 견뎌야했다. 강병대교회는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 처한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

제주에서 가장 흔한 자재인 현무암으로 지어 검은 빛깔을 띤 180평 크기의 강병대교회당은 여느 예배당과 달리 폭이 좁은 편이다. 당시 훈련소 막사 크기에 맞춰 건물을 짓고 지붕을 올렸기 때문이다.

1952년 1월 31일 열린 제주노회 제23회 정기회에서는 장성칠 군목의 보고를 받고, 노회 산하 전 교회가 강병대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하기로 결의한 일도 있다. 당시 제주노회와 교회들은 전쟁을 피해 온 수많은 난민을 돌보며,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강병대교회 또한 그 가운데서 한몫을 했다.

전란 중 샛별유치원을 개원해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을 감당하는가 하면, 부흥회와 음악예배 등을 개최하며 지역복음화와 교회들의 연합에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육군훈련소가 육지로 옮겨간 후에는 공군부대 기지교회로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으며, 야간중학교 과정인 신우고등공민학교를 부설기관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강병대교회 예배당은 일제강점기 건설된 알뜨르비행장과 함께 굴곡 많았던 제주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 불리기까지 치러내야 했던 수많은 고통과 상처의 시간들을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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