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순간마다 신앙양심 중심 지키다
일제 압박서 산정현교회 끝까지 수호 … 영적 후손들, 애국신앙 유산 키워가

애국신앙의 산실 산정현교회를 일으키고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끝까지 수호한 찰스 프랜시스 번하이젤 선교사.
애국신앙의 산실 산정현교회를 일으키고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끝까지 수호한 찰스 프랜시스 번하이젤 선교사.

“그대와 걸은 모든 걸음이 내 평생의 걸음이었소. 그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내겐 소풍 같았소. 그대는 여전히 조선을 구하고 있소? 꼭 그러시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긴 칼을 찬 정복 차림의 일본 경찰들은 싸늘한 눈초리로 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복경찰들까지 수십 명이 현장을 에워싸고 덩달아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65세 고령의 미국인 선교사는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는 노회 석상입니다. 무슨 일이든 처리할 때는 교회법을 기준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정치 제1장 7조를 보십시오. 우리는 교인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어떤 재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작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도 수많은 총대들의 양심을 억누르고 결정한 것입니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 남문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평양노회 임시회. 개회 벽두에 노회장 최지화는 이날 회의의 목적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평양노회 산하의 유일한 교회, 바로 산정현교회를 징계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옛 모습.
평양 산정현교회의 옛 모습.

각본을 짜놓은 듯 모든 절차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일제의 막무가내 식 신사참배 강요 정책 앞에 이미 총회나 평양노회는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산정현교회의 폐쇄와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치리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장의 삼엄함에 맞서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북장로회로부터 파송돼 40년 가까이 한국에 머물고 있던 찰스 프랜시스 번하이젤, 한국 이름으로 편하설이라 불리는 선교사였다.

교수로서 번하이젤의 능력이 빛을 발했던 평양신학교의 옛 전경.
교수로서 번하이젤의 능력이 빛을 발했던 평양신학교의 옛 전경.

그는 이미 산정현교회 문제와 관련해 여러 차례 경찰에 불려가 조사와 경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경찰은 이 임시회를 앞두고 노회에서 내리는 결정에 반대하지 말 것을 노골적으로 지시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엄청난 위세조차 번하이젤의 소신을 주저앉힐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게 한국에서 마지막 사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시작된 번하이젤의 발언은 결국 끝을 맺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라고 소리 지르던 경찰들이 기어이 그를 붙잡아 회의석상에서 끌어내고는 경찰서로 연행해갔기 때문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1906년 산정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 그의 여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 한국교회와 민족사가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마다 어김없이 산정현교회가 중심에 있었고, 그 곁에는 번하이젤이 항상 함께였다.

오늘날 장례식과 추도식 찬송가로 널리 쓰이는 찬송가 606장의 가사는 번하이젤 선교사가 우리말로 최초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장례식과 추도식 찬송가로 널리 쓰이는 찬송가 606장의 가사는 번하이젤 선교사가 우리말로 최초 번역한 것이다.

조국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지휘한 강규찬 목사, 일본의 우상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한 주기철 목사가 체포되어 강단을 비울 때면 아무도 대신하려 하지 않는 그 자리를 번하이젤이 자진하여 채웠다. 고난 앞에 중심을 잃고 흔들릴 뻔했던 교회는 키다리아저씨처럼 든든히 버텨주는 선교사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할 수 있었다.

작은 당나귀를 타고 전도하러 다니는 소탈함과, 강단과 교탁에 서서 바른 신앙과 신학의 길을 준엄하게 설파하는 실력을 겸비한 이 열정의 선교사를 사람들은 몹시 좋아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수많은 위협을 감수해야했던 번하이젤의 안타까운 속내는 임시노회 사건이 있은 지 열흘 후 자신의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내가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만 전혀 일을 하지 못하게 제한받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교회, 특히 목사와 전도사가 모두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교인들을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저들(일본)은 어떻게든 나와 교회 관계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교회 정치현장에서 널리 활용되는 고퇴를 처음 도입한 인물도 번하이젤이다.
오늘날 교회 정치현장에서 널리 활용되는 고퇴를 처음 도입한 인물도 번하이젤이다.

안타깝게도 번하이젤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번하이젤은 그로부터 2년 후 한국 땅을 쫒기 듯 떠나야했다. 심지어 미국으로 돌아간 번하이젤은 이후 자손의 대가 끊어져 가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패배였을까?

아니었다. 결국 패망한 것은 일본제국과 그 편에 서서 추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던 교권주의자들이었고, 번하이젤이 혼신을 다해 지키고자 했던 산정현교회와 순교자들은 아름다운 명성을 두고두고 떨치는 승리자가 되었다. 그가 한국에 심고 키워낸 영적인 후손들은 ‘선교사 편하설의 가문’으로 지금껏 무럭무럭 번창하는 중이다. <끝>

번하이젤의 자취를 찾아

평양 산정현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서울 산정현교회(서울시 서초구 명달로15길 18-11/(02)585-3580)는 순교기념관 내 역사실에 초대 담임목사인 번하이젤 선교사를 비롯해 강규찬 주기철 조만식 장기려 등 한국교회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산정현교회 출신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비치해두고 있다.

번하이젤 선교사와 한국 땅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 헬렌, 그리고 평양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가족사진.
번하이젤 선교사와 한국 땅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 헬렌, 그리고 평양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가족사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경기 이천시 대월면 대평로214번길 10-13/(031)632-1391)에서는 번하이젤이 활동한 시기 평양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기독교인들의 선교사역과 애국활동 등을 문서 사진 유물 등 여러 전시품으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올 연말까지는 ‘북한지역의 3·1운동 역사’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도 함께 진행된다.

숭실대학교는 번하이젤을 포함한 학교 설립 초창기 교수로 활약한 선교사들에 대한 집중 연구를 위해 ‘뿌리찾기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를 통해 연구한 결과물들을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을 통해 ‘불휘총서’ 시리즈로 내놓고 있다.

번하이젤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남긴 유품들은 딸 헬렌이 보관하다, 가깝게 지내던 백한원 장로를 거쳐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기증됐다. 이 중 일부 내용이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의 후원을 받아 <편하설의 선교일기>(김인수 저·쿰란출판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강규찬 주기철 그 곁의 편하설
생명 담보하여 한국교회 수호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190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는 부흥이 이어지면서 분립개척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1906년 1월 26일 산정재 또는 산정현이라 불리는 언덕, 평양시 계리 55번지에 분립개척한 평양제4교회가 바로 산정현교회이다.

초대 담임목사는 찰스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한국 이름으로는 편하설 선교사였다. 편하설 선교사는 2대 한승곤 목사가 그 사역을 이을 때까지 산정현교회를 담임했으며, 시무사임한 후에도 한동안 협동목사로 섬기면서 교회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가 바로 당시 산정현교회 3대 담임목사이었던 강규찬이다.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를 정도로 민족을 사랑한 강규찬 목사가 만세운동으로 다시 수감되었을 때, 편하설은 대신 산정현교회 설교를 맡아 교회를 감싸 안으며 위로해주었다.

그의 위로는 산정현교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붙잡혀 고초를 당하던 조선땅 전체를 위로했다. 고난당하는 조선 교회 곁에서 편하설은 든든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1936년 산정현교회 6대 담임목사로 주기철이 부임했다. 이후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주기철 목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순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결국 1944년 순교한다. 산정현교회가 순교 직전까지 주기철 목사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편하설에 의해 세워지고 꾸준히 유지된 신앙적 전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어 있던 기간에도 편하설은 산정현교회 강단을 지켜냈다. 이 임무 또한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본경찰은 그의 설교를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편하설은 굴하지 않고 강단에 섰다.

설교 직후 경찰에 소환되고, ‘다시 한 번 설교하면 체포나 추방’이라고 협박까지 받았지만 편하설은 목자 잃은 교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용기 있게 행동했다. 사실 일본 경찰이 집요하게 편하설의 설교를 막으려했던 것은 산정현교회에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를 세우려는 의도였음을 편하설은 알아채고 있었다. 교회를 절대로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줄 수 없었기에 편하설은 순교하는 마음으로 강단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편하설에 압력을 가한 것은 일본 경찰만이 아니었다.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던 평양노회까지 부끄럽게도 편하설을 압박하고 나섰다. 1940년 3월 4일 노회가 그에게 보낸 공문은 ‘특별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있으므로 산정현교회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편하설은 분명한 목회자요, 신앙인으로서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편하설은 교육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03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도덕학, 성서지리, 수학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29년까지는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전임교수 역할을 했다. 산정현교회 사역의 짐을 벗은 이후의 일이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재미있는 기록들도 남아있다. 편하설이 10여 년간 평양 인근 산골마을들에 당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순회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의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다. 당나귀 위에 앉아서도 조선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문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니. 선교사로서 그의 사명감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엿볼 수 있다.

27살의 젊음과 패기를 가지고 1900년 10월 가을에 한국을 처음 찾은 편하설은 67세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떠밀려 나갈 때까지 생명을 담보하며, 한국교회와 산정현교회를 사랑으로 지켜낸 고마운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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