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진개동산이라 불리는 모슬포 항구 인근 언덕길에는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왼편의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오른편의 당시 경찰서장 문형순을 기리는 공덕비 사이 한가운데에 한 목회자의 공덕비가 놓여있다. 주인공은 모슬포교회를 담임한 조남수 목사이다.

조남수 목사를 제주 사람들은 한국판 ‘쉰들러’라고도 부른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학살의 위기에 처한 수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 오스카 쉰들러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국 해방이 되었을 때 조남수는 제주에 남아있던 유일한 목회자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향해 가던 무렵, 일본은 미국이 한반도 진격을 위해 제주를 먼저 공략할 것에 대비해 가장 의심되는 존재인 교회들 대부분을 폐쇄하고 목회자들은 육지로 이주시켰다.

조남수 목사는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한림교회의 강문호 목사와 함께 제주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목회자에 대한 배급중단 처분 때문에 간신히 연명해야 했고, 의지하던 강문호 목사마저 미군의 공습으로 교회당과 사택이 폭격을 맞고 가족과 교우들까지 잃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아 섬을 떠나면서 그야말로 외로운 처지가 됐다.

기적처럼 해방이 왔지만 제주도 곳곳에 산재한 24개 교회를 조남수 목사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낙심해있던 이도종 목사를 설득해 복귀시키고, 육지로 나간 강문호 목사를 불러들여 닫혀있던 복음의 문을 다시 열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제주의 교세는 빠르게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1948년 벌어진 4·3사태로 제주에는 또 다른 암흑기가 찾아왔다. 좌익과 우익이 서로에게 가차 없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 모슬포항구 인근 진개동산에 건립된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
제주 모슬포항구 인근 진개동산에 건립된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

무장대 혹은 토벌군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가옥이 불타고, 크고 작은 약탈을 당하는 성도들은 부지기수였다. 조남수 목사는 이 난국 속에 절친한 동역자 이도종 목사를 잃었고, 모슬포교회를 함께 섬기던 허재성 장로와 최순임 허영국 고창선 등 여러 교우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잇달아 지켜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조 목사 본인까지 한밤 중 무장대의 습격으로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한 위기를 넘겼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도 조 목사는 모슬포경찰서를 찾아가 설득을 시작했다.

“우향도 좌향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합니다.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이 일에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자신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지 닷새 후부터 조남수 목사의 ‘자수선무 강연’이 시작됐다. 첫 강연을 듣고 자수한 100여 명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강연은 무려 150회나 계속됐다. ‘자수했다가 처벌 받는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자결할 것’이라는 그의 다짐에 사람들은 진심을 느꼈다.

총부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의 사면에 앞장서고, 억울한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두루두루 주변을 세심하게 살핀 조 목사 덕분에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보존했다.

주민들 손으로 목사의 공덕비가 세워진 사연은 이러하다. 조남수 목사가 보여준 화해자로서 삶은 4·3사태의 기억이 사람들 뇌리에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나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모슬포교회 내 사료전시관에는 제주선교 역사와 함께 조 목사의 빛나는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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