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서귀포 대정골성에는 추사관이라는 역사적 장소가 있다. 바로 여기서 유배생활을 하며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는 김정희 선생의 인생과 애환이 녹아있는 곳이다. 여기서 불과 담장 하나 건너엔 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위한 다른 공간이 마련돼 있다.

제주 대정교회에는 순교자 이도종 목사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이 직접 산방산 돌을 캐와 세운 순교기념비가 서있다.
제주 대정교회에는 순교자 이도종 목사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이 직접 산방산 돌을 캐와 세운 순교기념비가 서있다.

제주 대정장로교회. 70여 년 전 제주 땅을 온통 뒤흔든 4·3사태 당시,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사역하다 숨진 고 이도종 목사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을 예배당 앞마당에 마련한 교회이다.
이도종 목사는 제주 출신 첫 목회자이다. 일제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 온 남강 이승훈 장로를 통해 복음을 접했고, 금성교회가 제주 최초의 신앙공동체로 출발할 당시에 함께 한 8명 중 하나로 참여했다. 아버지 이덕연 또한 훗날 장로로 임직하고, 자녀들을 모두기독교학교에 진학시킬 정도로 철저한 신앙인이 되었다.
금성교회를 함께 섬기던 조봉호 선생의 1919년 독립군 군자금 모금 사건이 터졌을 때 연루된 인물로 체포당한 기록이 있을 만큼, 이도종이라는 이름은 초창기 제주교회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청년 이도종의 신실함과 사역자로서 가능성을 발견한 제주선교사 이기풍은 그를 평양으로 보내 숭실학교에 다니도록 한다. 한동안 모슬포교회 이경필 목사를 도와 제주 산남지방 전도인으로 활동했던 이도종은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드디어 목회자로서 인생을 시작했다.
전북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김제 등지에서 목회하다, 1929년 고향 제주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의 왕성한 사역이 펼쳐진다. 서귀포교회 법환교회 남원교회 고산교회 용수교회 조수교회 화순교회 등이 그가 직접 개척했거나, 담임하면서 성장시킨 교회들이었다. 그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제주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노회장 재직 시절 제주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그가 그토록 정성을 쏟았던 교회들은 극심한 침체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제주의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해 소개령까지 내린다. 자책과 실의에 잠긴 이도종은 목회를 그만두고, 귀농생활에 들어간다.
해방 후 동료 조남수 목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목회 일선에 복귀한 이도종은 스스로를 추스르고, 다시금 신앙과 사역의 고삐를 조인다. 제주에 남아있는 목회자가 거의 없어 두 사람은 무려 24개의 교회를 돌보아야 했다. 이도종 목사는 산북지방의 교회들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쉬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제주 전역이 어수선했지만, 이도종 목사는 아랑곳 않고 교회들을 다시 일으키는 데만 집중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집회를 개최하는 그의 수고 속에서 제주의 교회들은 조금씩 다시 살아났다.
1948년 4월 3일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좌익세력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미 크고 작은 충돌과 유혈사태를 겪었던 제주에서는 이때부터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아군과 적군에 대한 명백한 구분조차 없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취급을 받았다.
6월 13일 이도종은 한경면 고산리의 자택에서 자전거에 몸을 싣고 서귀포를 향해 출발했다. 화순교회 등 남쪽의 교회들 안부를 확인하고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목적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대정읍 무릉2리 인향동 부근, 속칭 고린다리라 불리는 지역에서 인민무장대에 붙잡힌 후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그의 순교현장 인근의 대정교회에는 이도종 목사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성도들이 산방산 돌을 캐와 만든 순교기념비가 건립됐고, 그 곁에 고인의 유해도 옮겨졌다. 제주 제1호 목사이자, 제1호 순교자라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겨준 존재. 그렇게 이도종은 불멸의 이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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