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독립의지와 참 모습 세계에 알리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인 밀사 물밑서 적극 도와 … 외국인 최초 건국훈장 태극장

“황제가 미국인 선교사를 은밀히 만날 이유는 단 하나요. 밀서.”(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대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가 된 호머 베절릴 헐버트 선교사.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가 된 호머 베절릴 헐버트 선교사.

일제 관리들은 대 혼돈에 빠졌다. 자신들이 고종의 특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인물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오히려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조선인들이 속속 헤이그에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들은 극도로 초조해졌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 선교사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네덜란드로 직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고종이 은밀히 파견한 다른 특사들, 곧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의 조선인 밀사들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장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헐버트는 밀사들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 이상설은 한성사범학교에 근무할 당시 헐버트 선교사로부터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이후로 오랫동안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준은 헐버트가 설립을 주도한 YMCA와 상동감리교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뜻을 나눈 사이였다.

이준이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황제를 은밀히 만나 특사 임명을 받은 후, 러시아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을 만나러 조선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헐버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본의 정보망에는 혼선이 일어났다. 그들이 알고 있기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될 고종의 특사는 틀림없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였기 때문이었다.

헐버트에게 내려진 고종 황제의 특사 증명서.
헐버트에게 내려진 고종 황제의 특사 증명서.

만국평화회의는 당시 열강들의 세력 팽창으로 전쟁의 위기에 처한 세계 주요 국가들이 극한 대결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목적으로 소집된 모임이었다. 일본에 국권을 통째로 넘겨줄 위기에 처한 조선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믿었던 미국조차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과 뒷거래를 한 후 조선을 외면했다.

1906년 열리기로 예정되어있던 두 번째 만국평화회의는 전 세계에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알릴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이미 주변에 믿을 만한 측근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던 고종의 입장에서는 세계인을 상대로 조선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할 인물이 꼭 필요했고, 결국 헐버트가 적임자로 낙점됐다.

헐버트는 조선 정부가 세운 첫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을 처음 찾아온 후,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매료된 인물이었다. 특히 한글이 지닌 유려함에 흠뻑 빠진 그는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열성을 보여주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변란 중에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곁을 목숨 걸고 지키며 신임을 얻기도 했다.

헐버트 선교사가 저술한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헐버트 선교사가 저술한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앞서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다녀온 경험도 있기에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정세가 심하게 요동치며 2차 회의는 1년 후로 미루어졌다. 그 사이 함께 특사활동을 준비하던 이용익이 병으로 세상을 뜨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새로운 특사진이 구성되어야 했고, 헐버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더욱 커졌다. 그는 이준이 먼저 떠난 후, 고종을 따로 만나서 마치 스파이작전을 수행하듯 친서를 비밀리에 건네받았다. 마침 유럽 여행을 준비 중이던 미국남장로교회 소속 윌리엄 불 선교사에게 이 친서를 맡겼다가, 나중에 러시아에서 다시 만나 돌려받는 치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세 명의 밀사가 헤이그에 진입할 수 있도록 측면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위종이 헤이그에 모인 전 세계의 기자들 앞에서 조선의 처지를 호소하는 연설할 기회를 갖고, 현장의 언론들이 조선의 입장을 지면으로 널리 소개할 수 있었던 데는 헤이그 도착에 앞서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당대의 실력자들과 사전 협상을 한 헐버트의 공이 크다.

헐버트와 함께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된 세 인물.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헐버트와 함께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된 세 인물.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애석하게도 특사들의 임무는 일본의 끈질긴 방해와, 강대국들의 외면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종황제는 폐위되고, 결국 몇 년 후 우리의 국권은 일본의 손아귀에 완벽하게 들어갔다. 헤이그 현장에서 순국한 이준을 비롯해, 세 명의 밀사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국에서 안타까이 생을 마쳤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전 세계가 조선의 참 모습과 독립의지를 알게 되었고, 이는 훗날 광복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의 기초가 된다. 이후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헐버트는 마침내 해방 후,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에 돌아온 지 1주일 만에 숨을 거둔다. 대한민국정부는 1950년 헐버트에게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태극장(현 독립장)을 추서했다.

헐버트의 자취를 찾아

서울 종로에 공원으로 조성된 주시경마당에는 헐버트 선교사의 한글사랑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설치되어있다
서울 종로에 공원으로 조성된 주시경마당에는 헐버트 선교사의 한글사랑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설치되어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던 호머 헐머트는 그 염원대로 한국땅에 묻혔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14-3/(02)332-9174)의 남쪽 B구역에서 평생 한국을 향한 사랑을 품고 살았던 그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다.
종로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거닐다보면 국민은행 광화문사옥 옆에 조성된 ‘주시경마당’(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108)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나타난다.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주시경 선생과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조형물과 전시물들을 설치한 근린공원이다. 육영공원 교사로 재직 당시 헐버트가 제작한 한글 사회·지리교과서 ‘사민필지’ 등을 만날 수 있다.

헐버트의 한국 사랑이 표현된 또 하나의 자취를 찾으려면 멀리 경북 문경으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표 민요 ‘아리랑’의 뿌리와도 같은 장소인 문경새재 입구에 세워진 문경새재옛길박물관(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43-2/(054)550-8365)을 방문하면,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악보로 채록해 전 세계에 소개한 헐버트의 공로를 소개하는 아리랑기념비를 발견한다.

천안 독립기념관(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041)560-0114)은 이 땅의 자주독립을 위해 기여한 헐버트의 활동상을 전시물과 교육용 ‘배움 상자’를 통해 소개한다.

헐벗은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랑하다

조성민 목사(상도제일교회)
조성민 목사(상도제일교회)

호머 B. 헐버트의 별명은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이다. 양화진 제1묘역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는 어록이 새겨져있다. 이것이면 됐지 그의 한국사랑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유니온신학교 재학 중이던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였다. 그는 교사로 한국에 와서 열심히 우리말을 배우다가 한글에 반했고,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 땅에 한글로 된 교과서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90년에 순수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이름의 세계지리 교과서를 손수 만든다. 이 책의 서문에는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아니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는 대목이 있다. 세종대왕의 말씀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의 말이니 어찌 놀랍지 않을까?

헐버트는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시 귀국했다가, 1893년 9월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에 대한 헐버트의 진정한 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23년 간 봉직하면서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그는 한국인의 기질에 대하여 “한국인은 합리주의적 기질과 감정이 가장 알맞게 조화되어 있으며, 냉정과 정열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줄 알고, 또한 격노할 줄도 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 방향까지 역설했다.

또한 그는 열정적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일본과 일방적으로 맺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이 고종의 명을 받고 1907년 4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헐버트 선교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전에 헐버트는 고종의 특사로 미국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경찰들의 시선은 그에게 쏠려있었다. 그 사이 세 명의 밀사들은 비교적 쉽게 헤이그로 이동할 수 있었다. 헐버트가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헐버트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겨, 1908년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그가 한국을 강제로 떠나도록 만든다. 하지만 헐버트는 1909년 8월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강제 퇴위된 고종으로부터 해외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도록 비밀리에 은행에 예치한 25만 달러를 안전한 은행으로 옮겨달라는 밀명을 받는다. 비록 통감부의 간계로 다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까지 이어진 그의 한국사랑은 지극했다.

그 후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서 지내던 헐버트는 1949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국빈 초청으로 다시 내한했다. 그러나 86세 고령에다 여러 날의 여독이 겹치며 그는 1949년 8월 5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유언대로 한국땅에 묻혔고, 양화진에 마련된 그의 묘소에는 아들 셀던 헐버트도 나중에 함께 묻힌다. 1950년 3월 1일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시대적으로 헐벗은 한국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선교사, 헐버트 바로 이 한 사람이었다. “한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는 구절처럼 우리 또한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제2의 헐버트가 될 것을 다짐해보자.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