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하와이 이민노동자로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 법환교회가 세워지도록 물심양면 헌신한 강한준의 가족사진.
하와이 이민노동자로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 법환교회가 세워지도록 물심양면 헌신한 강한준의 가족사진.

“저는 현재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강한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미화 60원씩을 보내겠습니다. 이 돈으로 제가 살던 제주의 법환리에 전도인 한 명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전남노회 전도국에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전해진 것은 1917년 6월의 일이었다. 강한준은 제주에서 살다가 천주교도들과 연루된 신축교란, 일명 ‘이재수의 난’이 벌어졌을 때 마침 조선인의 대규모 노동이민이 이루어지던 하와이로 이주한 인물이다.

이민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믿게 된 강한준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고, 하와이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섬기면서 법환리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처음 5개월 동안은 15원씩, 이후로는 25원씩의 전도비를 꾸준히 보냈다. 당시 제주선교사 월급이 22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강한준의 지원이 제주선교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법환리 전도를 담당한 인물은 윤식명 목사였다. 윤 목사는 이미 1914년 전라노회를 통해 제주도에 파송되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산남 일대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는 중이었다. 산남지역은 뿌리 깊은 유교사상으로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윤식명 목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합심하여 전도에 매진해 상당한 열매를 거두었다.

기독신보 1916년 7월 12월자에는 제주선교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실렸다. “가장 재미있는 곳은 법환리라 하는 500~600호 되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에 강만호라 하는 80대 노인이 전도를 듣고 믿기로 작정한 후 주일을 부지런히 지키는데, 예배당에 주일마다 약 100명씩 회집하니 감사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제주도의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이런 과정을 거쳐, 강한준의 지원금을 보내오기 시작한지 4개월 만인 1917년 10월 1일 법환교회의 설립예배가 열렸다. 태평양 너머 하와이에서 부르짖던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로 응답하신 것이다.

하지만 윤식명 목사의 사역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 설립 이듬해 10월, 윤 목사는 법환리로 전도하던 길에 만난 한 신흥종교 신도들에게 집단으로 폭행당해 한쪽 팔이 부러지는 봉변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 한 해 뒤에는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조봉호 전도사의 독립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까지 치른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법환교회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광주에서 파송된 원용혁 조사는 윤 목사와 애환을 함께 하며 법환교회를 열심히 섬겨, 부인조력회(여전도회)와 당회가 조직되어 안정된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오랜 기간 공헌한다.

전도부인 천아나는 법환교회의 첫 번째 전도사로서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교회 부흥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법환포구 너른 광장에서 주민들의 일손을 도우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져있다.

이들의 수고를 통해 성장한 법환교회는 1922년 6월에 첫 예배당을 마련한다. 초가 2동과 대지 100평의 예배당을 구입하는 데는 다시 하와이에서 강한준이 보내준 거액의 헌금이 큰 힘이 됐다.

이후 80년 동안 법환교회는 복음을 위해 한 길을 걸어왔다. 한일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린 2002년 당시에는 ‘월드컵기념교회’로 선정돼, 각계의 지원 속에서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선교와 문화사역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했다. 법환교회 역사관에는 이 모든 세월들이 집약되어있다.

지금도 법환교회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라는 슬로건 아래 강한준이 이역의 섬에서, 윤식명 원용혁 천아나가 삼다도의 현장에서 꿈꾸었던 소망을 계속 현실로 이루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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