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교 목사(서성로교회)

김장교 목사(서성로교회)
김장교 목사(서성로교회)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란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머물게 하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늘 쓰고 있는 말이다. 그 말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야고보 기자는 그의 서신서에서 말이란 신앙인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척도임을 전한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가져야 할 공동체의 감각(social interest) 즉 공동체의 관심에 기준점은 너와 나의 관계이다. 그 관계성에서 이루지는 나눔이 바로 말인데 그 말이 어떤가를 통하여 그 공동체의 공간과 실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말에는 진실성이 있고 온도가 있다. 너는 얼굴도 이쁘다 라고 말하는 것과 너는 얼굴만 이쁘다라고 말할 때에 느껴지는 그 공간의 온도는 어떻게 될까? 베네주엘라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려 성당 안에 있던 6000여 명이 공포에 질려, 밀고 밀치는 바람에 46명의 사상자가 났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소매치기들이 작업을 벌이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해 저지른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고함을 쳤던 소매치기 일당도 문제이지만, 거기에 휩쓸려 46명의 사상자를 낸 군중도 문제였다. 화재의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소란을 피웠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거짓 경보가 너무 자주 울린다. 양심 없는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 소리의 팩트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소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동을 친다. 진실된 말이라고 전해지고 그것이 사실화로 되어가는 것이 우리들이 처한 공간의 현실이다.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요동을 치는데 물어본다. “확인해 봤어?” “아니 누가 그러던데?” 정당하지 못한 말, 확인되지 않는 말이 우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하고 괴롭게하며 혼란 속에 피해를 입힌다.

우리는 변화와 회복이란 주제로 103회 총회와 104회 총회를 나아간다. 변화와 회복이란 전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말이다. 그 말에 의해서 우리가 거하는 공간이 결정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에게 허영심이 많은 제자 한 명이 있었다. 사치를 좋아 하고 돈을 물쓰듯이 쓰는 이였다. 제논이 제자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야단을 쳤다. 그러나 그 제자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 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말입니까?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 데 왜 간섭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제논이 말했다. “그러면 소금이 많다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에 소금을 마구 집어 넣어도 되느냐? 무슨 일에든지 절제가 있어야 한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말의 공간을 바르게 세우는 말을 해야한다. 그 한 마디 말로 공간 안에 있는 공동체의 너와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잠언 25장 11절의 말씀을 묵상해본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이 말씀은 신하들이 왕에게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의 언변력을 뜻하는 것이다. 신하가 왕을 알현하는 궁궐에서 전하는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맞는 합당한 말은 예술가의 손길을 통해서 아로새긴 최고의 은쟁반 위에 놓인 최상급의 사과와 같은 최고의 가치를 말한다. 경우란 어떤 환경인가를 확인하고 그 확인된 말을 법정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합당한 말을 할 때 그 말이 그 공간의 최고에 가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의 진실성과 온도가 이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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