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장대현교회가 분립 개척한 평양 산정현교회 초대 담임목사(1906년)는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선교사였다. 그 후에도 한동안 협동목사로 섬기면서 교회를 든든히 지켜준 사역자이다. 숭실대학교 철학교수이기도 한 그는 1919년 평양 3·1운동을 주도했던 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 목사가 옥고를 치를 때는 설교를 맡아 교회를 감싸 안은 채 위로해주었다. 105인 사건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를 정도로 민족을 사랑한 강규찬 목사 곁에서 든든히 힘이 되었던 선교사가 편하설이다.

또 1936년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엄청난 옥고를 치르다 순교했다. 그런 그를 교회가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편하설 선교사에 의해 유지된 신앙적 전통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주기철 목사가 투옥된 기간에도 편하설은 산정현교회 강단을 지켜냈다. 그는 일경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강단에 섰다. 설교 직후 경찰서에 소환되고 다시 한 번 설교하면 체포나 추방이라고 협박했지만 목자를 잃은 교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용기 있게 행동했다. 일경이 설교를 막으려던 것은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이었지만 편하설은 교회를 넘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압력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던 평양노회까지 나섰다. 1940년 3월 4일 노회가 그에게 보낸 공문 내용은 ‘특별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있으므로 산정현교회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었다. 27살의 젊음과 패기를 가지고 1900년 가을에 한국을 찾은 편하설은 67세에 강제로 떠밀려 나갈 때까지 생명을 담보하며 한국교회와 산정현교회를 사랑하며 지켜냈다.

늦가을 예배당 앞의 예쁜 단풍에 편하설이 겹쳐 보인다. 한국교회와 산정현교회를 지켜내는데 큰 힘이 되었던 편하설. 붉게 물든 단풍처럼 곱고 예쁜 교회의 모습을 지켜내도록 젊음을 바친 편하설. 그 모습 뒤에 다시 겹치는 또 하나의 그림인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쁜 단풍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같아 슬프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부끄러움으로 찬바람에 부르르 떨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는 누가 우리 교회를 위해 울어주고 또 지켜줄 수 있을까? 우리 교회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일 뿐. 70여 년 전 세상에 굴복하는 우리 교회를 슬픈 눈으로 지켜보던 편하설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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