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삶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 … 진영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결단 통해 ‘조용한 혁명’ 돼야

‘선하고 온전한 뜻’을 현실서 구현해가는 ‘분별’ 필요하다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현 상황에 대해 글을 쓸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사회의 좌우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경제체제 뿐 아니라 북핵 문제, 미중일 등 주변국 관계, 동성애와 같은 젠더 문제 등이 복잡하게 엉켜있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기에 경제체제만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축소한다 하더라도 기독교를 결코 어느 한 체제와 간단히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고아와 과부에 관심을 가질 때조차 기독교는 해당 이데올로기와 같은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일에 관심을 갖는 동기는 그저 윤리적 의식 때문도 아니고, 부자에 대한 증오나 반발 때문도 아니다. 또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며 세를 늘리는데 도움이 되어서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체험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현재의 사회적 긴장 가운데서도 다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자원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돌아보고, 제도적 보호가 가능하도록 힘을 보탤 뿐 아니라, 당장 그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을 때조차 남다른 개인적 삶을 결단함으로써 미래 변화의 씨앗 심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거룩한 산 제물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대표적 본문은 로마서 12장 1절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 말씀이 권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세상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산 제물’이란 죽여서 드리던 구약 제물과 대비되는 말이다. 죽음으로 성립하던 그 제사는 주님이 자신의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성하셨다. 우리는 다만 그 영원한 제사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된 우리는 그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바울은 그것을 영적 예배라 했다. 진정한 예배라는 뜻인데, 종종 껍데기만 남을 수 있는 제의와 형식으로 된 예배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의도하던 진짜 내용이 담긴 예배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내내 제사와 절기가 단지 껍데기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바울의 권면은 또 단순히 산 제물이 아니라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는 것이었다. 거룩하다는 말을 ‘구별됨, 남다름’이라고 보면, 우리는 다시 ‘남다름’이라는 주제로 돌아온 셈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시작해 신약으로 왔지만 여전히 동일한 부르심, 곧 ‘남다름에의 부름’ 앞에 서 있다.

사실 로마서 12장 1~2절의 세팅 자체가 여호수아서 1장과 동일하다. 그 때 이스라엘은 모압 평지에서 자신들의 구원 이야기를 상세히 들은 후 이제 요단강을 건너려고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에 대해 격려하셨다. 그런데 로마서의 세팅도 똑같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이제 세상 속에서 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이(특별기고 1편 참조)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줄기차게 남다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을 실현하기에 요구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산 제물이 될까? 어떻게 세상의 사람들 앞에 남다른 삶의 제사가 될까? 로마서 12장 1~2절은 두 가지를 권면한다. 우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본받는다는 말은 쉬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ιζω)로서 세상의 패턴에 자신을 맞추는(conform) 것이다. 오늘의 정치 상황으로 말하자면 좌우이념 진영의 행태를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다른 삶이 되려면 그것부터 멈추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어느 진영에 서는 일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바울이 권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어느 진영에 서게 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는 말라는 거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거듭거듭 담대할 것을 요구하셨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했다.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 인한 변화(transform)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새롭게 하심은 어디서 올까? 그것은 은혜를 아는 데에서 온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자주 그리고 풍성하게 듣고 묵상해야 한다. 그럴 때 마음의 새롭게 됨이 깊어지고 분별 또한 깊어지게 된다.

선하고 온전한 뜻은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선하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려온 적이 없는 것처럼 매번 새로운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의 근간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마 7:12)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모르면 사람들은 이미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 늘 새로운 뜻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삼성에 갈까요 아니면 현대에 갈까요? 당신의 선하신 뜻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그가 삼성에 가든 현대에 가든 그 자체가 그 분께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기대를 바꾸라는 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이미 나타나 있다. 당신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어디를 가든 거기서 당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 그것이 그 분의 뜻이다. 그분의 뜻은 이미 ‘공의와 정의의 삶’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기대하는 바대로 당신도 그렇게 사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전히 분별이 필요한 그 뜻
문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 같은 그 뜻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최근 택시업계와 ‘타다’의 갈등의 경우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현재의 먹거리를 지키는 것과 미래의 먹거리를 시도해 보는 것 사이에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를 지키면 미래를 잃게 되어 결국 모두 잃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미래를 선택하면 수많은 택시종사자들은 당장의 삶이 무너진다. 하지만 해외에 나가서 그랩(Grab/카카오택시와 비슷한 승용차 공유제도)을 사용해 보면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안다. 그랩은 우선 여행자에게도 택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편리한데다 안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일에 종사하는 운전자들에게 이 새로운 방식은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있으며, 투 잡(Two Job)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손쉽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니 현재와 미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여 공공선을 구현해야 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미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분별이 필요하다. 이 분별에 있어 그리스도인은 새롭게 된 감각이 필요하다. 마치 암을 치료할 놀라운 물질의 존재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학 마인드를 가진 엔지니어’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의 원칙들을 현실에 구현해 나감에 있어서도 단순히 자기 진영의 이익이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두루 모두에게 애정을 가진 감각과 시선으로 고민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주님은 그들의 도전과 시행착오들을 통해 그 뜻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실 것이다.

신앙 안에서 그 때의 최선을 고민해야
어느 하나도 쉽고 간단한 것은 없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도들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고 또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때로는 사회 인식과 제반 상태가 준비돼 있지 않아, 그 시도가 하나의 운동이 되기에는 시기상조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때에는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의 원리들을 가르치는 일과 함께 개인적 결단의 삶을 통해 조용한 혁명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대학자인 그는 그토록 양극화된 시대에 그 한쪽 극단에 있던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동역자로, 영적 아들로 받아들였다. 그런 마음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던 빌레몬과 그의 교회에 전하고, 그를 자유케 함으로 자신의 마음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행동은 당대에 조용한 혁명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역사를 바꿀 또 다른 누군가의 출현을 예고하는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윌리엄 윌버포스와 같은 다음 주자가 나타났다. 윌버포스의 투쟁방식은 입법운동이었다. 노예무역이 영국 국가 재정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던 때에 그는 노예무역의 폐지를 주장했다. 당대의 조롱과 동료의원들의 비협조, 의회 표결에서의 무수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20년간 불굴의 헌신으로 그 일을 이루어냈다. 이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정치인 윌버포스의 뒤에는 신앙인 윌버포스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외친 정의와 진리는 곧 그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의 어두운 그림자는 단지 입법으로 모두 걷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다음 주자 마틴 루터 킹의 등장이 필요했다. 그가 택한 방식은 평화적 대중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I have a dream” 같은 주옥같은 연설과 명언들을 쏟아냈다. 그것은 훗날 오바마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오늘 광장에도 그리스도인이 서 있다. 우리의 입에는 어떤 말이 있는가? 절제된 감동인가 아니면 끔찍한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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