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사라봉공원에 세워진 애국지사 조봉호 전도사의 기념탑.
사라봉공원에 세워진 애국지사 조봉호 전도사의 기념탑.

제주항 인근에는 사라봉이라 불리는 명소가 있다. 아름다운 일몰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지인 동시에, 운동시설을 구비한 시민공원으로 매일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특히 사라봉공원 경내의 모충사에는 서울의 탑골공원이나 효창공원처럼 높은 공덕을 쌓은 인물이나 애국지사 등 제주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을 기리는 시설들이 여럿 설치되어있다. 특히 먼발치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게 우뚝 선 세 개의 탑이 그 정점을 이룬다.
하나는 흉년으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제주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자선을 베푼 상인 김만덕을 위한 탑이고, 다른 하나는 1909년 일어난 제주의병항쟁을 기념하는 탑이다. 마지막 하나의 탑은 조봉호라는 인물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조봉호는 1884년 제주도 한림읍 귀덕리에서 조만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난 거부였던 집안에서는 대를 이어갈 장손의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고, 그리하여 조봉호는 19세에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입학한 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였다. 이 학교에 재학하면서 조봉호는 일찌감치 기독교신앙과 함께 애국애족 정신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04년 귀향한 조봉호는 제주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인 금성교회를 일으키는데 앞장선다. 자신의 집을 기도처로 제공하는가 하면, 영흥학교를 세워 젊은 후배들을 키우고, 이기풍 목사를 도와 성내교회 조사(전도사)로 활동한 기록도 남아있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은 조봉호가 가슴 속에 키워온 애국신앙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였다. 제주에서도 3월 20일과 22일까지 제주읍성에서, 4월 8일에는 서귀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며 항일과 독립의 의지가 한창 치솟는 중이었다.
조봉호는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국내에 전하고, 독립군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김창규를 만난다. 그를 도와 모금 활동에 앞장서며, 무려 1만원의 군자금을 마련해 송금한다. 당시 쌀 반가마니 가격이 2원에 불과했고, 연간 제주선교비 총액이 1천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만원은 제주사람들의 헌신이 담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눈부신 행적은 얼마 안 돼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선봉에 섰던 조봉호는 물론이고 무려 60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군자금 모금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그 중에는 이기풍 목사의 뒤를 이어 제주 선교를 책임지도록 전북노회에서 파송한 김창국 목사와, 전남노회에서 파송한 윤식명 목사도 있었다.
조봉호는 홀로 이 사건을 책임지기로 결심한다. 자청해서 군자금 모금의 주동자가 본인이었다고 고백하고, 1919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복역을 위해 대구형무소로 향해 떠난 길은 그의 마지막 행로가 되고 말았다. 1920년 4월 28일 그는 옥중에서 숨진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시신조차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아 묘소를 마련할 길 없었던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제주 사람들은 1977년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라는 글자를 새긴 탑을 사라봉에 세운다. 비문의 글귀 중 “조봉호 지사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니, 동지를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받으리”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는 조봉호가 나고 자란 생가가 남아있으며, 그가 세운 금성교회도 지척에 있다. 그가 남긴 모든 자취들이 제주사람들의, 제주교회들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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