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특정 이데올로기 지지하는 데 관심 없어 … 지금 우리에겐 ‘하나님 방법이 옳다’는 믿음이 필요

치우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정화하자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지난 글에서 ‘타락’에 대해 일부 언급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출현하지만 그 고상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한 세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데에는 ‘타락’이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사람들은 인간성의 부패라는 이 타락의 문제를 무시하고 그 이상에 낙관적으로 매달려 열광하지만, 그들이 열광하는 그 이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타락은 자본주의도 타락시키지만 사회주의도 타락시켰다. 정치 분야에서 타락은 심각하여 뻔한 거짓말과 말 뒤집기, 명분 가로채기, 중상모략과 선동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저변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무엇에 궁극적 행복과 기쁨과 의미와 안전을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결국 이데올로기가 구세주가 된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것들을 약속해 주는 듯이 보일수록 이데올로기 싸움은 격렬해진다.

타락의 또 다른 현상:책임 전가
우상숭배 외에 타락의 또 다른 현상은 책임 전가다. 타락 아래 인간은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기보다 끝없이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모습은 고스란히 오늘 우리의 정치에도 나타난다. 우파는 우파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개선하기보다 애써 부인하고 비난한다. 그 기울기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에 공감하기보다 그건 저들의 책임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런가 하면 좌파(특히 마르크스 레닌 계열의 좌파)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건 당신들 탓이 아니라 저 부자들 때문이고 저 대기업 때문이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구조 탓이야!”라고. 현 정권은 전 정권을, 전 정권은 현 정권을 탓하며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다.

물론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가 그들 책임은 아닐 게다. 하지만 이런 섬세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이 사태를 전쟁 수준으로 키워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전쟁이 되면 도덕성은 나중 문제가 된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은 줄곧 누구편인지만 묻는다. 그 외의 말은 필요 없다. 하지만 그렇게는 결코 올바른 답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답은 늘 어느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Needs)의 세밀한 균형점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전쟁 모드는 쉽게 포기될 것 같지 않다. 당파적 이익 때문이다. 전쟁 모드에서는 모든 막말이 정당화되고 그래서 한껏 자극하면 지지층들이 확실하게 열 받아서 더욱 확실히 응집되기 때문이다.

“내 이데올로기에 맞춰 설교해 주시오!”
이런 전쟁 같은 정치 탓에 각 교회는 당황스런 상황에 직면한다. 밖에서 한껏 자극받은 교인들이 설교자의 설교가 자기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설교가 이념적으로 맞지 않으면 회중석에선 노골적으로 불편함이 표출된다. 어떤 이들은 설교 후 전화 혹은 문자로 거칠게 항의도 한다. 몇 마디 짧은 카톡으로 질문이 오지만 대답은 결코 짧은 몇 마디로 될 수 없는 것이어서 목회자는 더욱 힘들다. 그런 논쟁적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무슨 이야기라도 금방 논쟁으로 비화할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필자는 창조-타락-구속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만약 오늘 예수께서 오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늘은 누가 예수를 못 박을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당시에 주님을 못 박은 자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아님을 알게 된다. 로마병정들은 단지 수동적 가담자들이었을 뿐 주범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첫째는 기득권 때문이었다. 성전을 둘러싸고 온갖 특혜를 누리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자 예수를 공격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들은 보수 우파다. 그렇다면 군중은 왜 그랬을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세상은 말 탄 기병을 거느린 메시아가 와서 급진적으로 뒤집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급진적이긴 하나 ‘다른 방식으로’ 그러했다. 말을 타고 나타나야 할 자리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한 시라도 마음 급한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자신을 강하게 어필해야 무시당하지 않을 세상인데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울고 있는 자들이 빛과 소금이라니! 그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요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지독한 얼간이였다.

당신은 오늘 설교가 당신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있는가? 그런 눈으로 주님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떤 사람이 못 박을까? 좌파우파 이데올로기에 의해 열 받은 성마른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말씀보다 이데올로기가 더 기준이 된 사람들, 그들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방법, 그 분의 길이 옳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도 낯선 영역(우리의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눈앞의 여리고성을 매일 매일 돌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성이 무너질 거라 믿고 오래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 그게 문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로 난 길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걸을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이 부분에 관련해서 사람들은 성경이 자본주의 자유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 이데올로기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 궁금해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성경은 어느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각 이데올로기가 수렴되어야 할 기준과 중심으로 존재한다. 어떤 이유로 한 이데올로기와 다소 비슷한 점이 있어 보이는 경우라 하더라도 들여다보면 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나그네에 대한 성경의 관심이나, 그런 주변적 존재(marginal people)에 대해 주님이 보여주신 일체감(양과 염소 비유)은 기독교가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과 같지 않으며 특히 마르크스-레닌 계열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이고 계급론적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못사는 이유가 단지 자본가의 탐욕 때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탓’이 많으며,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계급투쟁 밖에 없다. 투쟁의 전략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증오를 일으켜 조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도 가난한 자들이 가난해 진 것이 정말 자본가들 때문만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까? 그렇지 않다.

각자의 삶과 그 결과에 대한 인정
물론 성경도 부자의 탐욕과 무관심에 대해 경고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부자를 악으로, 가난한 자들을 선으로 보지도 않는다. 성경은 그들 모두를 죄인으로 본다. 인간은 부패했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가난한 자들이 가난하게 된 데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부자들의 탐욕이나 그들이 만든 불공정한 구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탐욕과 실수, 잘못된 선택과 경영 실패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난하게 될 수 있고, 근면하지 않아서 몰락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살아왔으나 악의적 동업자나 보증사기로 인해 가난해 질 수 있음도 성경은 배제하지 않는다.(잠24:33 잠22:26 잠17:18 잠6:1 잠6:6 잠6:9) 따라서 성경은 그런 이유로 품꾼이나 혹은, 더 심하게, 남의 종이 되는 경우가 있음을 담담하게 언급한다. 사회 속에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자체로 곧바로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강한 자에 대한 경계와 책임
하지만 성경은 그런 중에도, 자본가들의 탐욕과 권력과의 유착이 힘없는 개인을 더욱 어렵게 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전토에 전토를 더하고 가옥에 가옥을 더 하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고, 품꾼의 삯을 제 때 주지 않는 고용주에 대해 경고한다.

그렇다면 부자는 탐욕을 부리지 않거나 권력과의 부정한 유착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건가? 그렇게만 하지 않으면, 삶은 다 각자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서로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모두에게 각자 책임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렇다고 공동체가 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한없이 개인책임으로만 치부하며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공동체는 희망을 잃은 자들이 영원히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울 책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개인적으로’ 공감하며 긍휼히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망이 대물림 되지 않게 하는 그 일이 단지 개인적 긍휼을 통해서만 아니라 희년 등 ‘국가적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서도’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당신이 부자라는 점이 아니다. 성경이 문제시 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이기심이다. 그 죄는 자본가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노동자에게도 있다. 자본가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다 악이고 노동자의 요구는 다 선인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가에게만 아니라 노동계 안에도 많은 죄가 있다. 그 죄는 자신과 다른 시각, 즉 두루 따뜻한 하나님의 시각을 거부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시각이다. 어떤 노동조합은 이제 거대 권력이 되어서 자본의 타락을 뺨치는 수준의 행태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땐가부터 어떤 노동이 권력이 된 이후 이제는 정경유착(政經癒着)만 우려하게 된 것이 아니라 정노유착(政勞癒着)도 우려하게 되었다. 노동도 자신의 지지 여부를 무기화하여 정치권을 압박함으로써 각종 제도와 시스템을 왜곡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치우치지 않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각 진영에서 자기가 속한 진영을 정화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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