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성내교회당 앞 팽나무는 이기풍 목사와 막내 딸 이사례 권사의 애틋한 사연을 품은 제주선교 초창기의 증인이다.
성내교회당 앞 팽나무는 이기풍 목사와 막내 딸 이사례 권사의 애틋한 사연을 품은 제주선교 초창기의 증인이다.

제주도 관덕로 2길, 삼도동이라 불리며 옛 제주 성읍의 중심지를 차지한 이 동네에는 오래된 팽나무 하나가 있다. 높고 넓고 풍채가 좋은, 코흘리개 아이도 넉넉히 타고 오를 만큼 편안한 자태를 지닌 이 팽나무에는 첫 제주선교사 이기풍 목사와 연관된 사연 하나가 숨어있다.

이기풍 목사 내외는 이 동네에서 섬 곳곳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밤늦게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목사의 어린 막내 딸 사례는 온 종일 심심하고 외로웠다. 해질녘이면 행여나 귀가하는 부모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그녀는 이 팽나무에 올랐다. ‘어서 오세요 아빠, 보고 싶어요!’

100년 전 사연의 주인공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팽나무는 여전히 그 동네를 지킨다. 이 가족들이 김재원, 홍순홍, 김행권 등과 함께 1908년 세운 성내교회는 몇 차례 복잡한 분립과 통합 과정을 거쳤다. 예장과 기장의 분열 중에는 한 가족이었던 이들이 팽나무 주변으로 담장을 치고 서로 반목하는 아픔의 시기도 겪었다.

지금은 기장 성내교회 예배당이 팽나무와 그 아래 세워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비 및 이기풍 목사 공적비를 품고 있다. 같은 역사를 계승하는 예장 성안교회와 기장 동부교회는 각각 제주시 아라동과 일도동으로 옮겨 자리를 잡고 이기풍 목사의 정신을 따라 선교와 봉사에 매진하는 중이다. 설립 100주년이던 2008년부터는 ‘한 뿌리 세 교회’라는 구호 아래 세 교회가 연합예배를 갖기도 했다.

이들이 제주 교회의 효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더 빠른 시작을 한 공동체도 있다. 바로 애월읍의 금성교회이다. 이기풍 목사가 찾아오기 전, 이미 제주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벨트브레 하멜 귀츨라프처럼 자의나 타의에 의해 제주를 찾아온 개신교인들과 주민들의 접촉이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적으로 첫 서양선교사가 찾아온 것은 러시아 출신 피터스(한국명 피득)와 영국 출신 켄뮤어가 제주 선교여행을 한 1898년의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이 제주를 찾아와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부산과 제주를 오가던 사람들이 베어드(한국명 배위량)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오는 경우처럼, 육지와 접촉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알게 되고 신앙을 갖게 되는 사례들도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알게 된 조봉호 이도종 등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1907년부터 금성리 양석봉씨 집에서 회집하다, 이듬해 제주를 찾아온 이기풍 목사의 지도로 정식 교회 설립을 하게 된 것이 금성교회의 탄생 배경이다.

지금도 금성리를 찾아가면 현재의 금성교회 예배당 주변으로 첫 기도처로 사용된 집터와 옛 예배당, 그리고 이도종 목사의 생가 등 제주교회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유적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토착인 성도들의 활약은 초창기 제주선교에 큰 동력이 됐다. 여기에 이기풍 목사의 뒤를 이어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평양연합여전도회 후원을 받아 두 번째 제주선교사로 파송한 이선광 전도사, 숭실학교 학생 김형재, 훗날 전라노회가 파송한 윤식명 목사까지 제주선교 사역에 합류하면서 복음은 더욱 왕성하게 전파되고, 계속해서 교회들이 세워졌다.

성내교회와 금성교회 외에도 성읍교회 삼양교회 조천교회 모슬포교회 용수교회 중문교회 한림교회 고산교회 등이 제주교회사의 도입부를 장식한다. 조선독노회와 전라노회는 지속적으로 제주를 돌보며, 외국 선교부가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을 주도한 육지와는 다른 형태의 문화를 이루어냈다. 성내교회의 팽나무와 금성교회의 첫 기도처는 이 모든 역사를 지켜본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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