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 긍지의 복음 심다
첫 근대 중등학교인 계성학교 설립, 애국애족 정신 함양 … 전도재단 세워 후원역할에도 진력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며 교육과 복음전도로 이 땅을 위해 헌신한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며 교육과 복음전도로 이 땅을 위해 헌신한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

“이걸 보고 가는 중이요.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으로. 불꽃 속으로.”(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서슬 퍼런 헌병대장이 서양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변명도 공박도 다 소용 없었다. 자신을 선교사이자 학교 교장이라고 밝힌 사내의 요구는 딱 하나, ‘내 학생들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가 관철되기 전까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듯 느껴지는 기색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지만 동시에 미국북장로교 소속 학생들이오. 그런 학생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데 대해 나는 우리 정부에 보고하겠소. 폐교를 운운한 당신의 망언도 함께 말이오. 당장 풀어주시오. 이 아이들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한국명 안의와)는 당당했다.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온 지 12년째, 그는 일제에 모든 것을 빼앗긴 이 땅의 백성들과 울분을 함께 하고 있었다. 특히나 자신이 세운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이 그 침략자들의 손에 피투성이 몰골이 되어버린 걸 목격하고 나서는 오직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두려움을 모두 잊었다.

계성학교는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에 개교한 첫 근대 중등학교였다. 앞서 대구제일교회에 최초의 사립학교인 대남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 더 높은 수준의 교육기관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대구선교부 구내 행랑채에서 계성학교의 문을 열었다.

계성학교 교정에 세워진 아담스 선교사의 흉상.
계성학교 교정에 세워진 아담스 선교사의 흉상.

‘거룩한 시작’을 의미하는 계성학교의 교훈을 아담스는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智之本)’ 즉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성경 잠언의 구절로 정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천국의 소망, 그리고 자주독립의 열망을 키워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학생들은 당차게 성장했다. 그들이 스스로의 결기를 표출해낼 기회는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왔다. 1907년 초겨울, 영친왕 이은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을미사변의 참담한 기억이 여전한 상황에서 황후에 이어, 대한제국의 황태자까지 일제에 빼앗긴다는 의분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건이 뒤이어 발생했다.

‘우리 계성의 학도 20인은 조선 땅이 왜놈의 발아래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어’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결의문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체포되어 거친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급박히 헌병대로 찾아간 아담스 선교사는 담판 끝에 주동자로 지목된 배동석을 제외한 학생들 전원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계성학교는 일제의 눈총과 견제를 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아담스는 이에 아랑곳 않고 학교를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 온갖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그가 백방으로 모금한 돈으로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까지 불러 모아 지어낸 2층짜리 학교 건물은 지금까지 ‘아담스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학교의 상징 역할을 한다.

설립자이자 교장인 아담스의 지지 속에서 계성학교의 애족정신은 계속 빛을 발한다.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계성학교 학생들은 직접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손에 들고 자매학교인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의 선봉에 섰다. 이처럼 계성학교라는 존재는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대구를 항일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아담스 선교사는 1924년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30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한국인들을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된 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된 계성학교 아담스관.

위해 살았다. 매코믹신학교 재학 시절부터 한국선교의 꿈을 함께 꾸며 어진 동역자 역할을 해주다 병으로 먼저 떠낸 아내 넬리를 이 땅에 묻고, 본인 또한 악화된 건강문제로 오래 시달리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버텼다.

특히 공식 선교사 직함을 내려놓은 후에도 그는 ‘아담스복음전도재단’이라는 이름으로 기금을 마련해, 자신과 동역하던 한국인 사역자들을 후원하는데 힘썼다. 이 기금은 대구와 안동 일대에 무려 73개의 교회가 개척되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대구와 영남을 대표하는 신앙공동체로 지금껏 건강하게 성장했고, 그가 일으킨 계성학교 그리고 아들 에드워드(한국명 안두화)가 한국으로 돌아와 1954년 세운 계명대학교는 기독교교육과 조국 발전의 요람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다.

청라언덕 은혜정원에 조성된 넬리 딕 아담스의 묘소.
청라언덕 은혜정원에 조성된 넬리 딕 아담스의 묘소.

미국에서 들여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정성껏 키운 사과 또한 ‘대구능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는 지역의 대표 산물이자,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선 물산장려운동의 보배 역할을 했다. 그가 이룬 많은 것들이 대구의 자랑이 됐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담스, 그보다는 안의와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한 이방인이 이 땅의 가장 큰 자랑으로 남아있다.

“당신의 지혜, 당신의 충성심, 당신의 열정은 우리 조선인 형제들에게 한결같은 영감이 될 것입니다.”

아담스의 자취를 찾아

‘청라언덕’이라 불리는 옛 대구 제중원(계명대 동산의료원) 자리에서 3·1만세길을 따라가면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스 선교사의 자취를 마치 보물찾기하듯 발견하게 된다.

아담스 선교사와 아내 넬리 부부의 사진.
아담스 선교사와 아내 넬리 부부의 사진.

현재는 의료선교박물관으로 활용되는 스윗즈주택(대구시 중구 달성로 56/(053)250-7100)을 비롯해 챔니스주택 블레어주택 등 옛 선교사들의 사택들에서 대구 선교 초창기 아담스 선교사의 활약상을 확인한다. 또한 아담스 선교사의 아내 넬리가 잠든 은혜정원,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가져다 심은 원조 대구사과의 3세목 보호수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인근의 계성중학교(대구시 중구 달성로 35/(053)232-8351) 교정에는 학교 설립자인 아담스를 기리는 여러 상징물들이 눈에 띈다. 고인의 흉상 곁에는 학교 교훈으로 삼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비석이 나란히 서있고, 고인이 직접 설계한 영남 최초의 근대식 학교 건물로서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아담스관이 잘 보존되어있다.

대구제일교회(중구 국채보상로 102길 50/(053)253-2615) 반야월교회(동구 안심로 55길 20/(053)960-7000) 범어교회(수성구 청호로 84길 71/(053)667-8900) 사월교회(수성구 달구벌대로 661길 61/(053)795-2305) 등도 역사관 혹은 기념관에 그와의 기억을 간직해두었다. 

선교의 밀알 아담스
피와 눈물의 기도, 지역 변화시켜

최영인 목사(대구 사월교회)
최영인 목사(대구 사월교회)

대구·경북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에 대하여는 그동안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냈던 선교보고 편지를 입수하게 되었고, 이를 사월교회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번역하여 <황무지에 장미를 심는 마음>이란 이름으로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아담스의 편지는 신앙고백과 간증 그 자체이며, 한국과 한국백성 그리고 무지몽매한 영혼을 사랑했던 그 고백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아담스 선교사는 1895년 4월 29일 미국에서 출발하여 1895년 5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데이빗 선교사의 집에 임시 거주하면서 한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하루에 4~5시간을 한국어 공부를 하고, 2~3시간은 밖으로 나가 한국인과 대화를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부산에서 약 10마일(16km) 떨어진 동래에 현지인 집을 구입하여 현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언어를 공부했다.

그런데 매형인 베어드 선교사가 1896년 10월 급하게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대구 선교지부의 책임이 아담스 선교사에게 인계 됐다. 그는 1897년 11월 1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대구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이듬해의 을미사변 등 이 땅에는 크고 작은 변란들로 인하여 백성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관리들의 폭정은 심해졌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전염병과 괴질이 창궐하여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순교한 사례가 많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더럽고 못사는 나라에서 사역을 하였지만 그것 또한 주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전에는 몰랐지만, 저는 더 이상 미국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이상 고향에서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삶에 파고들었습니다. 저의 집, 저의 일, 저의 삶, 저의 마음, 저의 관심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불러들이는 것과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미국에는 더 이상 제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황무지에 장미를 심는 마음> 중에서)

대구의 신도 수는 1902년에 177명, 1903년에 477명, 1904년에 780명으로 증가했다. 사역은 빠른 속도로 확장하였고, 조직화와 결집과정 역시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약 34개의 그룹과 다수의 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그는 한국에 온 후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한 달 이상의 휴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루라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학교가 방학하면 바로 다음날 아침 시골로 떠났고, 5일 밖에 순회를 할 시간이 없어 하루에 한 교회씩 다녔다. 마지막 날 오후에 도착한 교회에서 새벽 1시 반까지 교리문답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친 후 7시에 교인총회를 시작해서 세례를 베풀고, 학습교인들을 받아들이고, 집사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아침 8시에 시골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25마일을 이동하고, 다음 날엔 성경위원회 업무차 서울로 떠났다. 그 다음날 조사와 성경보급인들을 위한 2주간의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대구로 돌아가는 길에 타자기를 들고 다니며 2등 열차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것이 안의와 선교사의 연속된 일상이었다.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거닐면서 문답을 하던 모습을 연상시키듯 조사와 함께 도보로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지를 전하며 말씀을 전파했다. 이런 전도여행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아담스 선교사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기도가 대구·경북지역을 변화시켰다. 이 땅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대변자인 선교사로부터 사랑을 받은 직접적인 수혜자임을 깨닫고, 그 받은 사랑을 또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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