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평등 관념으로 조선인 대해야’ 역설 … 연희전문학교 등 중심으로 인재 키우고 복음 전파

전방위서 한민족 자주독립을 지지하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을 지낸 호레스 그랜트 언더우드.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을 지낸 호레스 그랜트 언더우드.

이건 나의 히스토리(History)이자 러브스토리(Love Story). 그래서 가는 거요. 당신의 승리를 빌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주의 인물(注意人物) 미국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이름 앞에는 이런 딱지가 붙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죄던 일제가 1909년 11월 통감부 보고서를 통해 요주의 감시대상으로 지목한 미국인에게는 ‘원두우’라는 한국 이름도 있었다. 그는 어쩌다가 당대 권력의 눈에 미운 털이 박힌 것일까.

이 보고서가 작성되기 직전인 9월 16일 언더우드는 종로 YMCA회관에서 한국의 청년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언더우드의 일거수일투족은 일제의 촉각을 곤두서게 했다. 통감부가 녹취한 당시 연설의 내용 일부를 들어보자.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신애(信愛)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경술국치를 겪기 1년 전,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보겠다고 나선 이 땅 민중들의 의지는 의병활동으로, 각종 반일집회로 거세게 표출되고 있었다. 그 항쟁의 중심에서 큰 몫을 한 세력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인들, 특히 언더우드와 직간접으로 관여된 교회와 학교들이었다.

1914년 서울 선교 30주년을 기념해 강연하는 언더우드 선교사.
1914년 서울 선교 30주년을 기념해 강연하는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제물포에 상륙했다. 내한 직전 경유지 일본에서 조선인 개신교 신자 이수정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전해 받으며 복음을 위해 준비된 땅 한국에 대한 깊은 설렘을 느꼈고,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도 교분을 가지며 당시 정세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언더우드가 반일 노선에 서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을미사변, 곧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한 나라의 황후가 처참하게 목숨을 잃고, 민족의 위상이 비참하게 짓밟히는 장면을 가까이서 목격한 선교사는 이후 철저히 조선의 편에 선다.

그 무렵 선교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종황제의 피신을 도운 ‘춘생문 사건’, 암살 시도를 우려해 선교사들이 고종을 불침번으로 호위하며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 배달했다는 ‘철가방 일화’, 아관파천 이후 고종 황제의 45세 생일을 축하하는 만수성절 행사와 명성황후의 추도집회 거행 등을 앞장선 주인공이 바로 언더우드였다.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그의 활약은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을사늑약과 고종의 퇴위 등 이미 국운이 기울고,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옹호하는 인사들까지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미국 내 강연 등을 통해 조선인들을 ‘인류평등의 관념’으로 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들의 이 땅에서 활약상을 보여주는 언더우드가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선교사들의 사진조형물.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들의 이 땅에서 활약상을 보여주는 언더우드가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선교사들의 사진조형물.

한일병탄이 이루어진 후에도 그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이 세운 정동교회(새문안교회)와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인재들을 키우며 한국을 향한 사랑을 꽃피운다. 또한 <예수교회보>를 창간해 일본 총독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활동을 펴는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 대한성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 회장 등 여러 역할을 책임졌다.

하지만 32년 동안 한국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축적된 과로는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고, 1916년 4월 요양 차 미국으로 떠난 길에서 언더우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애틀랜타에서 숨진 그의 시신은 그로브교회 묘지에 안장됐다.

언더우드가 입양해 키운 한국인 소년 김규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신민회와 흥사단을 세운 도산 안창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등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장식한 경신학교 출신들의 활약상은 언더우드 사후에도 눈부셨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제물포 상륙을 묘사한 인천의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탑.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제물포 상륙을 묘사한 인천의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탑.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외아들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일한)는 대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활동하며 연희전문학교에서 한국학을 발전시켰고, 일제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체포되고 추방당하는 수모 속에서도 끝까지 한국을 지켰다.

특히 3·1운동 당시 스코필드와 함께 일제가 자행한 제암리 사건의 실체를 전 세계에 알리고, ‘사랑하는 조선 동포여, 조금만 참으면 조선이 독립될 것입니다!’라고 일제강점기의 한국인들을 격려했던 원한경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을 돌보다 과로사로 이 땅에서 숨을 거둔다.

일본인들에게는 ‘위험인물’ ‘배일인사’ ‘정략가’로 낙인 찍혔던 언더우드, 그렇기에 한국인들은 더더욱 그를 은인이자 친구 혹은 자신들을 향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산 연인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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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자취를 찾아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언더우드 기념상.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 두 차례나 훼손되었다가 복원되는 수난을 겪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언더우드 기념상.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 두 차례나 훼손되었다가 복원되는 수난을 겪었다.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1599-1885)에는 학교 설립자 언더우드 선교사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져있다. 캠퍼스 중앙의 언더우드 기념상과 1925년 석조건물로 건립되어 사적 제276호로 지정된 언더우드관을 먼저 둘러보고, 교정 서편의 옛 선교사 사택을 개조한 언더우드가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언더우드 가문의 면면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새문안교회(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77/(02)732-1009)는 역사관을 통해 서울 최초의 장로교회가 지내온 세월들을 보여주고 있고, 언더우드에 의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신중고등학교(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74/(02)762-0393)는 혜성교회와 함께 언더우드기념관 건립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상륙을 기념하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인천광역시 중구 인중로 272)에는 이들이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디는 생생한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며, 길 건너편 기념탑교회는 당시 선교사들의 행로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전시물로 소개한다. 양화진외국인묘원(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46/(02)332-9174)에는 언더우드 선교사 3대의 가족묘소가 꾸며져 있다.

 언더우드 정신을 기리다

민족 위한 온전한 기독인 세우다
 

정명호 목사 (혜성교회)
정명호 목사 (혜성교회)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여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한국명 원두우)는 188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교단의 파송을 받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조선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의 첫 개신교인 이수정을 만나 언어를 배우고, 조선의 관습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조선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각박했다.

그는 먼저 조선 정부가 선교사 알렌을 통해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병원이었던 제중원(설립 당시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다. 또한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이화여고 맞은 편 현 예원학교 일대에 자리했던 언더우드의 사택에서는 대한성서공회의 모체인 ‘성서번역위원회’(1887년), 대한기독교서회의 모체인 ‘조선성교회’(1890년), 새문안교회의 전신인 ‘정동교회’(1887년)가 시작되었다.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통해 아이들과 청년들을 일깨워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던 언더우드는 그의 사택 사랑방 한 칸에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고아들을 위해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공부를 가르치는 고아원을 개설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학당의 첫 번째 학생은 자택 앞에서 구걸하던 한 아이였다고 한다. 남루했지만 눈에 총기가 가득했던 이 아이는 이후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버지니아 주 로노크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이 학교의 교감으로 봉직한다. 그가 바로 종교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인 김규식 박사였다.

이 고아원은 1889년 1월부터 기포드 선교사가 전담하면서 점차 학교의 형태로 변모했다. 1890년 1월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가 맡으면서 ‘예수교학당’(Jesus Doctrine School)으로, 1893년 4월 밀러(한국명 민로아) 선교사가 맡은 이후로 ‘민로아학당’이라고 불렸다.

이후 어려운 경제여건 때문에 선교회의 결의로 폐쇄되었다가, 1901년에 이르러 연지동 1번지로 자리를 옮겨 ‘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1905년에는 “세계 사조를 외면한 구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청소년으로 하여금 새로운 배움을 통해 진리를 깨우쳐 간증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경신’(儆新)이라는 학교명을 정하였다. 또한 언더우드는 1915년 조선기독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이 대학이 1917년 연희전문대학으로 성장하며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일제에 의해 반일인사로 여겨져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던 중 1916년 미국 뉴저지의 병원에서 별세한다. 하지만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안장되었다.

필자가 섬기는 혜성교회는 설립 71주년을 보내는 동안 언더우드의 정신을 이어받은 경신학원과 담장을 마주하고 ‘하나님나라 확장’이라는 가치 아래 함께 걸어왔다. 경신학원이 정규학교라는 기관의 모습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해왔다면, 혜성교회는 기독교대안학교인 이야기학교, 한아름유치원, 청소년 방과후학교인 러빙스쿨 등을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는 노력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정신이 다시 하나로 만나는 특별한 계기가 생겼다. 경신학교가 부지를 제공하고, 혜성교회가 건축비를 감당하여 기부 체납함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연합을 이 시대 가운데 제시하기 위한 ‘언더우드기념관’이 건축되고 있는 것이다. 연건평 3500평 규모로 2020년 2월 완공예정인 언더우드기념관을 통해 혜성교회와 경신학교는 모든 차이를 넘어서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며, 시대와 공감하는 역사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본디 한 뿌리였음을 기억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동역 가운데 언더우드의 비전을 이어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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