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드의 헌신, 고맙습니다

김대훈 목사(부산 초량교회)
김대훈 목사(부산 초량교회)

윌리엄 베어드는 1890년 우편수송선이었던 ‘차이나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일본을 거쳐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에 입항하면서 조선(이하 한국)과 낯설지만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졌고, 같은 해 9월에 부산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한국에 대한 긍휼로 가득했던 베어드는 선교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목표를 점검을 하면서 크게 두 기둥을 세웠으니, 복음과 교육이었다. 죄악과 무지, 가난과 외침(外侵)에 의한 억압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던 한국 땅, 우리 백성들에게 복음전파와 교육사업은 어쩌면 유일한 희망의 빛이었다.

베어드가 부산에서 사역하면서 세운 최초의 교회가 초량교회다. 그런데 초량교회의 시작은 ‘서당’이었고, 영어로는 ‘Chinese School’이라 표기됐다. 이 서당에 참석하였던 아이들은 대개 하인들과 부두 노동자들과 일본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노역자들의 자식들이었으며 모두 한국인이었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의 부모들은 까막눈 자식들이 한자와 한문을 배우기를 원했는데, 이들에겐 한자와 한문을 배우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베어드는 이것을 간파하고 교과과정에 한문을 많이 넣었다. ‘Chinese School’로 표기했던 이유도 중국 고전을 통하여 한자와 한문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산수와 지리를 가르쳤고, 복음의 핵심인 성경도 빼놓지 않고 가르쳤다. 그리고 베어드의 아내 ‘애니 베어드’(이하 애니)는 찬송가를 가르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베어드는 북진을 계속한다. 1897년 3월부터 두 달 동안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베어드 가족은 평양으로 이사를 간다. 거기서 ‘숭실학당’을 시작하였다. 베어드의 복음전파와 교육사업의 열정은 평양을 뜨겁게 만들었다. 숭실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고 나중에는 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숭실대학은 대한제국 시절 공식 허가된 최초의 근대식 대학이었다. 베어드의 숭실이 양성한 수많은 인재들은 빼앗긴 나라의 해방을 위하여 앞장서 뛰었다. 독립유공자로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고당 조만식을 비롯하여, 2019년 4월 현재 숭실 출신 독립유공자들의 숫자가 86명이다. 베어드에게 신앙과 나라사랑을 배운 참 지식인들이었다.

이런 열매 뒤에는 베어드의 말할 수 없는 희생이 있었다. 희생은 곧 사랑이다. 1892년 부산에서 태어난 첫째 아이 낸시 로즈가 2살도 되지 않아서 뇌척수막염으로 죽고,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넷째 아이 아더 패리스 베어드는 폐렴으로 죽는다. 아내 애니는 암이 재발하여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선택하면서 1916년 평양에서 죽는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으면, 한국에서 죽을 것을 결심하였을까? 인간 베어드의 눈물과 아픔을 헤아릴 길이 없다. 베어드 자신도 한국에 들어온 지 40년째, 장티푸스에 걸려 쓰러졌고 1931년 11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베어드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애도하였다. 장례예배가 열린 숭실대학 강당 주변에는 5000명이 넘는 조객이 몰려왔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많이 모였으며, 모두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던 베어드에 대하여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베어드의 희생과 헌신으로 불붙었던 복음과 교육은 훗날 우리나라를 일으키는 큰 밑천이 되었다. 뜨거운 신앙의 교회들과 뜨거운 교육열의 학교들 덕분에 한국은 무지와 가난에서 일어나 발전과 번영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온 삶으로 보여준 베어드에게 고맙다. 그리고 옛날 그의 장례식장에 모였던 조객들처럼, 한국을 사랑함으로 평생을 달려왔고 이 땅에 묻힌 그의 삶에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