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요즘 우리 사회에는 ‘성형공화국’이란 신조어가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성형수술에 목을 매고, 하도 성형수술이 유행이다 보니 외국인들까지 성형수술을 하러 여행을 온다는 이야기였다.

외양 가꾸기에 몰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언젠가는 꺼져갈 인간의 육체를 가꾸는 데 갖은 정성을 기울인다. 마치 육체가 최고의 섬김 대상인 것처럼 대한다. 육체가 우상이 된 듯하다. 인간은 늙으면 백발이 생기고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사람들은 자꾸 이 기본적인 상식을 거슬러 살려 한다.

그러나 백발과 주름은 가린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백발을 뽑아내고 주름살을 없애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백발과 주름살 속에 담긴 삶의 가치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로 묶어주신 주님은 우리가 선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로 묶어주신 주님은 우리가 선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조용히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육체는 질그릇이며, 이 질그릇과 같은 내 인생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다’고 고백했다. 질그릇이란 토기그릇을 말한다. 값싸고 약하고 깨지기 쉬운 흙으로 빚은, 보잘 것 없는 그릇과 같은 것이 우리 인간이다. 바울은 더 이상 육체를 신뢰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육체로부터 자유롭기를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질그릇 같은 인생’이란 깨져도 무방하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과연 이 깨지는 질그릇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하는 점이다. 바울은 질그릇과 같은 자기 속에 새로운 자랑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자기 자신의 깨짐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기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질그릇 같은 곁가지 인생 속에 보화인 예수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바울은 자신의 육체가 질그릇 같이 깨지면 깨질수록 그 속의 보화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이라는 사실 앞에서 겸손하고 엄숙해진다. 질그릇 속에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는 자는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추하고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만 노출한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 곧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지니고 있는 자는 오히려 질그릇 같은 자신의 거짓된 약점이 다 깨질 때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깨져도 결코 깨질 수 없는 분, 곧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의 몸으로 전달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이 질그릇임을 알고, 늘 깨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는 곧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따라가는 길이다.

나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란 것을 깨닫고 고백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가치와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권면하고, 그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만드시기 위해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이다. 질그릇임을 인정하는 겸손함 속에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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