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의 아픔과 진실, 기록하고 고발하다
탑골공원서 제암리까지 함성과 참상 카메라에 담아 … 생생한 목격기와 사진 세상에 널리 알려

자신의 한국어 선생이나 통역사였던 목원홍과 함께 한 젊은 시절의 스코필드.(독립기념관 소장)
자신의 한국어 선생이나 통역사였던 목원홍과 함께 한 젊은 시절의 스코필드.(독립기념관 소장)

지난해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겨레의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던 시절, 한국인들을 물심양면 돕다가 목숨을 잃는 미국인 선교사 ‘요셉’이 등장합니다. 짧은 등장으로도 많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요셉’의 캐릭터에는 이 땅의 자주독립, 빈민구호, 의료봉사, 교육계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을 뜨겁게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에 얽힌 감동적인 장면들을 하나씩 되새겨봅니다. <편집자 주>

 

“역사는 싸운 자들의 것이었다. 끝까지 싸운 자들만이 오늘은 죽어도 내일은 살 수 있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코를 감싸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불로 그을린 예배당과 주택들의 잔해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퍼져나왔다. 비명에 숨진 이들의 핏기운도 숨길 수 없었다. 가슴팍에 숨겨온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꺼내 렌즈를 바깥으로 향하고는 조심스럽게 누르기 시작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릴 정도로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앞장선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릴 정도로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앞장선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

1919년 4월 18일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화성 제암리에 서있었다. 사흘 전 바로 이곳에서 아리타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부대가 조선인들을 상대로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40여 채의 가옥들 중 겨우 여덟 채만 살아남았다. 특히 마을 중심에 서있던 제암리교회당은 만세운동에 앞장선 기독교인들과 주민들의 처형장으로 전락하며 함께 불에 타고 말았다.

끔찍한 소식을 전해들은 스코필드는 망설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로 향했다. 계속 따라붙는 일본 헌병을 따돌리느라 일부러 먼 길로 돌았다.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한쪽 손과 발이 불편한 상태였지만, 자신의 한국 이름(석호필·石虎弼)처럼 ‘호랑이’를 닮은 그의 굳센 의지를 무엇도 가로막지 못했다.

사실 스코필드에게 감시는 익숙한 일이었다. 평상시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고를 통해 일제의 침탈과 무단통치를 비난하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우군 역할을 해왔기에 총독부로서는 그의 존재가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설치된 스코필드 선교사의 조형물.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데 동원된 그의 카메라와 자전거가 눈에 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설치된 스코필드 선교사의 조형물.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데 동원된 그의 카메라와 자전거가 눈에 띈다.

3월 1일 종로에서 첫 만세시위와 독립선언문 낭독이 이루어졌을 때도 서양인인 그에게 봉기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고, 해외에 그 실상을 알리는 역할이 비밀리에 맡겨졌다. ‘34번째 민족대표’라는 별칭에 손색이 없도록 스코필드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했다. 그리고 탑골공원의 뜨거운 함성을 가득 담았던 카메라가 이번에는 제암리로 향한 것이다.

현장은 끔찍했다.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서른 명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과 거처를 한꺼번에 빼앗긴 사람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현장 조사를 나온 관료들과 일본인 장교들이 떠난 뒤에야 그들의 설움과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제암리 사건 당시의 처참한 모습.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제암리 사건 당시의 처참한 모습.

“대체 이 사람들이 무엇을 했다고 이토록 잔인한 심판을 내린 것일까? 무언가 잘못된 거야. 분명 잘못됐어!” 떨리는 발걸음이 제암리를 떠나 이웃 수촌리로 향했다. 거기서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상을 목도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툭하면 서울역으로 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압송되는 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위로를 전하는 한편, 기세등등한 일본 경찰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기도 했다. 경찰에 쫒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다친 이들을 손수 나서 치료해주었다. 그의 필치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만세운동에 대해 왜곡 보도하는 언론들은 대놓고 질타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는 유관순 등 여러 애국지사들을 자주 찾아가 문안하는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강의하는 노년의 스코필드.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강의하는 노년의 스코필드.

견디다 못한 일제는 그에게 갖은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캐나다장로회선교부는 스코필드와 세브란스병원 사이 근무 계약이 만료된 1920년 3월 그를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사실상의 추방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스코필드가 작성한 3·1운동 목격기 <끌 수 없는 불꽃>과, 카메라에 담은 서울과 제암리 등지의 생생한 사진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독립을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열망도 그를 통해 함께 입증됐다.

그는 항상 한국을 그리워했고, 이역에서나마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마침내 한국에 돌아왔다. 소원대로 그는 ‘제1의 고향’인 한국에서 생을 마치고 이 땅에 묻혔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 자취를 찾아

화성 제암리교회를 중심으로 조성된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031)369-1663)을 방문하면 스코필드 선교사의 생생한 자취들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전시관 앞마당에는 학살사건 당시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를 찾아온 스코필드가 사진기를 들고 일제의 만행 증거들을 촬영하는 모습을 표현한 입체상과, 스코필드의 생애 및 업적을 소개하는 돌판 등이 세워져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041)560-0114)은 당시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사진들이 수록된 영문화보집과 3·1운동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회고문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한 일선 학교용 역사교육자료를 제작해 인터넷(http://www.i815.or.kr)을 통해 제공하기도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02)748-0114)에는 스코필드 선교사의 시신이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애국지사 묘역(96호)에 안장되어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www.schofield.or.kr·02-875-0470)는 갖가지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고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소개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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