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총회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총회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총회부총회장)

1959년 9월에 열린 제44회 총회는 참으로 암담했다. WCC 가입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폭발했다. 당시 노진현 총회장의 사회로 밤을 새워 토론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정회를 선언하고 11월에 승동교회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WCC 가입을 찬성하는 측에서 일방적으로 연동교회에서 모여 가입 찬성을 가결해 버렸다.

반면에 반대 측에서는 총회의 법과 절차에 따라 11월 14일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여 WCC 탈퇴를 결정했다. 연동교회측은 통합이라 불렀고, 승동교회측은 합동이라 불렀다.
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현실적으로는 허허벌판 황무지로 나와서 총신대를 비롯해서 총회회관을 세우고 세계 최대 장로교단으로 부흥하는 눈물겨운 교단사를 기록했다.

우리 총회가 보수신학의 적통성을 사수하게 된 한 중심에는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한 51인 신앙동지회가 있었다. 조선신학교가 김재준 교수를 중심으로 정통보수신학에 반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자 51인 신앙동지회 회장이었던 정규오 목사가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보수신학을 사수하며 계승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총회의 미래 비전과 정치적 추진력이 있었던 이영수 목사를 통해서 교단 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교단이 분리되는 아픔 속에서 용산에 임시로 신학교를 설립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총회는 아무런 재원이 없었다. 그때 부총회장이자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였던 김윤찬 목사가 미국의 매킨타이어 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한국에서 보수신학을 사수하는 곳은 우리 교단과 총회신학교 뿐입니다. 우리 총신이 무너지면 한국의 보수신학도 무너집니다.” 당시 방송사를 2개나 가지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매킨타이어 박사는 몇 주 만에 10만 달러를 모금하여 보내왔다.

그런데 김윤찬 목사가 총회에서 모금 활동 내역을 보고하자, 오히려 일부 정치적 인사들이 총회의 결의 없이 단독적으로 모금 운동을 했다고 사과를 요구했다. 하긴 그럴 만 한 것은 매킨타이어 박사는 당시 ICCC총재였다. 우리 교단은 WCC도 반대했지만 분리주의를 서슴지 않았던 매킨타이어도 배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윤찬 목사는 총대들 앞에 나와서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며 호소했다. “나는 몇 번이고 사과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신학교를 건립하여 우리 총회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그 모습에 총회 현장에 있던 총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의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모금한 10만 달러로 용산신학교 교사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교사가 필요했다. 그때 백남조 장로가 사당동 1만 8000평의 땅을 헌납하고 현찰로 2000만원(지금의 100억원)을 헌금했다. 그리고 총회에서 명신홍 목사를 미국에 파견했다. 당시 명신홍 목사는 직장암 4기로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63년 8월 7일 그 아픈 배를 움켜잡고 목숨을 걸고 도미하여 5만 달러를 모금하고 25만 달러 후원 약정을 받아왔다.

이처럼 오늘의 총신대학교가 있기 까지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총회를 위해 헌신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바쳐졌던 것이다.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국가든 공동체든 역사를 망각하거나 초심을 잃으면 몰락했다. 우리 교단도 세계 최대의 장자교단이 되었지만, 지난날 고난과 눈물의 역사를 망각하고 초심을 잃는 순간 비극적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의 고난과 눈물의 역사를 알고 계승해야 한다. 필자는 ‘총회 100년을 설계하다’는 주제로 연재하려고 한다. 총회의 역사를 기억하고 축적하며 미래의 자산으로 삼을 때, 머나먼 역사의 여정에서 도태되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100년을 설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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