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섭 목사(대구동막교회)

송기섭 목사(대구동막교회)
송기섭 목사(대구동막교회)

세종대왕 시절에 정갑손이라는 사람이 함경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뛰어난 관리를 뽑기 위해서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을 보고는 시험 감독자들을 모두 불러 엄하게 야단을 쳤다. “여기 어째서 내 아들의 이름이 있는가? 내 아들이 평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그대들이 나를 속일 수 있는가? 나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렇게 했다면 부정을 저지른 것이니 잘못이고, 내 아들의 실력을 좋게 보았다면 사람을 보는 눈이 없으니 그 또한 잘못이네.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오게.”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이 얼마나 좋은 구호이며 원칙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 원칙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변칙과 반칙이 되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 기회가 균등하지 못하다고 가슴을 치며 아파하고 있지 않는가? 이 시대에 정갑손 같은 지도자가 없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다.

또한 도덕적 기준이 사람에 따라 바뀐다면 안 된다. 무게를 다는 저울이나, 길이를 재는 자가 사람에 따라 바뀐다면 얼마나 혼란이 오겠는가. 그 기준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 프로크루테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프로크루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철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침대에는 침대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서 그 누구도 침대에 딱 들어맞는 키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도덕적 잣대와 과정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퀴즈를 낼 터이니 한 번 풀어 보라. 어느 집에 불이 났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하게 불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소방관이 출동하였다. 불이 난 집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바람 때문에 가만히 두면 옆집으로 불이 옮겨 붙을 상황이었다. 어느 집부터 먼저 불을 꺼야 할까. 지금 불이 난 집부터 불길을 잡아야 할까. 아니면 옆집으로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옆집부터 소방 호스를 대고 물을 뿌려야할까. 정답은 돈을 준 집부터 물을 뿌린다는 것이다. 시대를 희화한 풍자이지만, 나라와 국정, 교회와 교정이 이렇게 간다면 정말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 역시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작금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이념을 따라서 행동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국은 소위 ‘조국 블랙홀’에 빠져서 국론이 분열되어서 마치 줄다리기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서로 대화하고 협상하고 양보하기 보다는, 이념명분에 갇혀 세 대결, 수 대결로 치닫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16세기 선조 초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벌어진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정쟁으로, 사림(士林)은 영남학파인 ‘동인’과 기호학파인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 권력을 잡은 동인은 서인 문제를 두고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열되었고,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또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역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선조 때 임진왜란과 인조 때 병자호란이라는 뼈아픈 굴욕의 역사를 맛보지 않았는가. 왜 역사를 현실의 거울을 삼아 우리를 돌아보지 못하는가.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이다.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해야 한다. 그러나 그 개혁은 빠르기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인 것을 우리들은 익히 다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성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과 원리가 있다.

정치인은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사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이념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정권을 잡으려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프레임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살아야 하지 않는가.

사무엘상 6장의 벧세메스로 길로 가는 암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송아지를 두고 간다. 그렇기에 갈 때에 울고 간다. 그러나 그 암소는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간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진리로 믿는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된다. 이데올로기와 진영논리가 성경적 가치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끊임없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사명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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