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서 목사(세곡교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창 27:33)

 

박의서 목사(세곡교회)
박의서 목사(세곡교회)

리처드 범브란트의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라는 작은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주일에 드릴 헌금으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의 용돈으로 받았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예배당을 향해 달려갔는데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당연히 손에 쥐고 있었던 두 개의 동전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동전의 하나는 저만치 굴러가다가 멈추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하수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가 남은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손가락으로 하수구에 빠진 동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리처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직면하는 많은 부분에서 주의 이름과 그 영광을 앞세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삭의 모습에서 그의 속에 감춰진 고집스런 속사람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고, 또 이삭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족장으로 살아간 이삭은 겉으로 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흔에 결혼하였고 20년이 지난 예순에 쌍둥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리브가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쌍둥이 때문에 여호와께 나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이 말씀이 이삭의 두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먼저 나온 아들은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동생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둘째가 첫째보다 더 강한 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이삭의 눈에 비친 둘째는 강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족장의 지위에 올라 많은 가산을 지켜갈 아들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보이는 현실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갈 적임자는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던 것입니다. 활쏘기와 사냥에 능한 에서가 야곱보다는 훨씬 자격을 갖춘 아들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삭의 시선은 언제나 에서를 향하고 있었고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면서 에서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삭의 면전에서 점점 멀어지고 보이는 현실과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복중에 있었을 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남아있어서 그의 양심을 괴롭게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현실이라는 무게감을 감당해 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보다 보이는 현실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과 사람들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세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가깝고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삭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의 생각과 판단을 고쳐주시기까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을 빨리 관철시키고 싶은 마음에 에서를 불러서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먹고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 27:1) 그러나 이삭은 이 일이 있은 후에 수 십 년도 더 살았으며 180세가 되어서야 죽습니다.(창 35:28)

이삭은 아직 죽을 날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금방 죽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도나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면 영적으로 우둔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이삭의 눈이 어두워진 것과 영안이 어두워진 것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에서를 축복하려 하였으나 야곱에게 속고만 것입니다. 야곱의 손에 있던 염소털을 만지면서 에서의 손이라고 하였으나 그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의 조급함이 분별력을 잃게 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서가 축복을 받고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자신이 계획한 것과 그 목표를 이루려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삭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없었습니다.

이삭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있었습니다. 힘들고 곤고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작은 아들 야곱이 그 자리에 앉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많은 재물과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엄청난 것들을 야곱이 지켜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대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거의 성공한 것 같았으나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말씀하신 하나님의 막판 뒤집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후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갔지만 이미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친 후였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7~29) 이삭이 야곱 축복하기를 마친 후에 에서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창 27:31) 깜짝 놀란 이삭은 네가 누구냐고 물었고 에서는 자기가 아버지의 맏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때 이삭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과연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요? 자기를 속인 리브가와 야곱을 향한 분노일까요? 본문의 정황상 이삭의 분노는 자기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쌍둥이가 태어난 후 70여 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보다 보이는 현실과 자기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자기가 뜻한 바를 이루려던 이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이삭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였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삭의 분노는 자기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보이는 현실과 자기 경험을 앞세우며 자기 지혜를 앞세운 삶의 결과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 달려가던 자신의 판단과 경험과 지식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기를 향하여 심히 크게 떨었던 그 순간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끝까지 그 일을 이루려던 그에게 하나님의 막판 뒤집기 한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며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못하던 족장을 하나님이 친히 굴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던 고집스런 마음도 하나님이 만져주셨을 때 자기를 향한 분노와 함께 자기부인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삭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생각과 경험을 앞세우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 끝까지 고집스레 달려간다면 하나님의 막판 뒤집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 여정 사이에서 오늘 내가 직면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일은 아닌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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