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대학을 다니면서 막연하지만 유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 유학의 꿈은 옥인교회 부목사 시절 이루어졌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주일 오후 헌신예배에 설교를 하러 오셨는데, 고등학교 시절 나를 가르치던 전도사님이셨다. 자신처럼 목사가 된 나를 보고 놀라던 그 분은 잘됐다는 듯 독일 이야기를 꺼냈다. “호 목사! 독일에서 목회해 보지 않을래?” 독일에서 한국인과 독일인 교회를 담임하던 그분은 당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독일 이민 목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3년 11월 가족과 함께 내가 부임한 곳은 뮌헨 한독교회였다. 한국인과 독일인 등 80여 명 정도가 모이는 이민교회 치고는 적지 않은 규모의 교회였다. 목회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교인들의 80% 이상이 박사과정의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간호사나 광부로 독일에 건너와 독일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들, 그리고 한국 회사 주재원들이었다.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특히 유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독일은 학비는 필요치 않지만 생활비는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곳이었다. 유학생 중에는 생활비가 부족해 밥을 굶는 이들도 있었다. 돈이 없는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데 학기 중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구한다 해도 보수가 적고 힘든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독일에 보내실 때 가난한 유학생들을 향한 각별한 계획도 있으셨다. 우리 가족이 처음 뮌헨에 도착했을 때 사택에 10kg 쌀 한 포대가 있었다. 교인들이 새로 부임할 담임 목사를 기다리면서 준비해 놓은 쌀이었다. 인사차 찾아온 교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하다 보니 며칠이 못돼 그 쌀이 똑 떨어지고 말았다.

독일에서 이민목회 중 시작한 쌀 나누기 사역은 옥수동에서 목회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서 이민목회 중 시작한 쌀 나누기 사역은 옥수동에서 목회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내로부터 쌀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 쌀을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히 쌀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 순간 그것이 작은 시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쌀은 사지 맙시다.” 내 이야기에 아내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잖아! 독일에서 목회하는 동안 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살고 싶어.”

나는 무릎을 꿇고 아내와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각별한 은혜로 나와 가족을 독일로 부르셨으니 먹을 것, 입을 것도 온전히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 그 믿음을 확인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국수를 삶아 먹었다. 그리고 밤 9시쯤 초인종이 울렸다.
독일에서는 미리 연락 없이 방문하는 일이 없고, 또 겨울밤이라 아주 어두운 시간이어서 누가 왔을까 싶었다. 놀란 마음으로 문을 열었더니, 한 집사님이 10kg 쌀 네 포대를 가지고 서 있었다. 집사님은 기도 중에 목사님 댁에 쌀을 가져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동차가 없었던 집사님은 그 추운 겨울밤에 택시를 타고 쌀을 가져오신 참이었다. 집사님을 배웅하고 쌀 포대를 집에 있는 작은 창고로 옮기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이후 교인들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쌀을 가지고 왔다. 얼마 안 가 창고에는 쌀 포대가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처음 쌀 네 포대를 받은 날부터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쌀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창고에 쌀이 쌓이는 족족 가난한 유학생들을 먹였다. 내가 쌀을 나눠주기 시작하자, 교인들도 하나 둘 쌀 나누기에 동참했다.

그때 교회의 재정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민자들은 이민자들대로 삶이 고단했고, 주재원들 역시 믿음이 그리 좋은 편은 못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회에서 주는 작은 사례비로 우리 부부와 어린 남매, 이렇게 네 식구가 생활하고 공부까지 하던 터라 늘 살림이 빠듯했다. 내가 살던 뮌헨에서 이탈리아까지 자동차로 4시간 거리밖에 안되었지만, 나는 독일에서 만 5년 동안 살면서 이탈리아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다들 그렇게 풍족치 못한 가운데서도 교인들은 더 어려운 유학생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지 21년만인 올해, 나는 처음으로 휴가를 이용하여 자비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내가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처음으로 벌인 쌀 나누기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시작한 쌀 나누기는 옥수동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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