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신앙공동체, 전남 동부 복음 거점되다
복음 접한 농촌마을 세 친구서 시작 … 수난의 역사 굳건히 견디며 교회사 중요 위치에 자리매김

광양은 물론 전남 동부일대 복음 전래의 거점이 된 웅동교회 예배당 전경.
광양은 물론 전남 동부일대 복음 전래의 거점이 된 웅동교회 예배당 전경.

산세가 깊고 계곡이 맑아 과연 곰들이 자주 출몰했을 법하다. 전남 광양과 경남 하동의 접경인 백운산 자락 깊숙이 위치한 웅동마을 이야기다. 지금은 저수지 축조 등으로 외부에서 고립된 동네처럼 변했지만, 본래 웅동마을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빈번히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이 조그만 동네에 첫 복음이 들어오게 된 계기는 특이하게도 1985년 발생한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을 인천에서 만나 척살한 조선인 한태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통쾌한 복수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가 달아나 몸을 숨긴 곳이 바로 남쪽 끝 광양의 웅동마을이었다.

웅동마을의 당시 웅동교회당.
웅동마을의 당시 웅동교회당.

하지만 일제의 감시망은 산골까지 뻗쳤고, 일본인 검사국 직원이 그의 행방을 정탐하기 위해 광주에서 웅동마을로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철저히 숨겨주며 침묵을 지켰고, 일본인 관리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허탕을 친 채 돌아가야 했던 그가 우연히 열어본 어느 집 방안에서는 사내 셋이서 마작판을 벌이고 있었다.

빈손으로 귀환하는 자신의 처지도, 노름으로 소일하는 조선인들의 처지도 똑같이 한심해보였을까. 그가 동정하듯, 훈계하듯 한마디 했다. “젊은 사람들이 이게 뭐하는 거요. 내가 사는 광주에는 야소교회가 있던데, 그 도를 믿으면 노름도 않고 좋은 사람이 된다고 합디다. 이렇게 살지 말고, 거기나 한 번 찾아가 보시오.”

웅동교회 설립자들. 왼쪽부터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웅동교회 설립자들. 왼쪽부터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지나치듯 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세 친구의 인생을, 그리고 웅동마을과 광양의 역사를 바꾸었다.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등 세 사람은 정말로 광주 양림동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을 돕던 조사 조상학을 만났다. 그로부터 복음을 전해들고 마을로 돌아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서는 전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 웅동교회의 기원이 됐다.

1904년에 시작된 웅동교회의 역사는 곧바로 이웃 신황교회로 이어진다. 예수 믿는 이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예배장소로 쓰던 동네 사랑방으로는 감당이 안 되자, 더 넓은 공간을 찾아 인근의 신황마을로 내려가며 교회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 것이다.

작은 산골 교회인 웅동교회가 배출한 목회자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활동 중이다.
작은 산골 교회인 웅동교회가 배출한 목회자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활동 중이다.

신황마을에서도 부흥의 역사가 이어져 교세가 계속 확장되었고,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대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교두보 역할을 맡게 됐다. 웅동의 성도들도 1908년 자신들 동네에 새로 예배당을 세우고 돌아갔다.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가 아닌, 한국인 성도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해 세워진 신앙공동체였기에 웅동교회는 모든 면면이 능동적이었다. 설립자들은 특히 눈부신 공헌을 했다. 자신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도록 이끄는 결실을 거두었다.

웅동교회당 곁에 건립된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웅동교회당 곁에 건립된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세 사람 중 서병준의 경우는 본래 역학을 공부하고 사람들의 사주관상을 보아주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모든 서적과 도구들을 불에 태우며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다. 그는 장기용과 함께 웅동교회의 초대 장로로 섬기며, 자신들의 가문에서 수 십 명을 헤아리는 목회자, 선교사, 신학교 교수, 사모 등을 배출했다. 웅동교회 출신으로 소속 교단 총회장을 지낸 인물만 4명이나 된다고도 전해진다.

1949년 일어난 여순사태는 웅동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 백운산 일대가 좌익 반란세력이 은거하는 중심지가 되면서 웅동마을 전체에 소개령이 내려졌고, 예배당은 불에 탔다. 이로 인해 고향을 떠나 지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2년이 되어서야 웅동으로 돌아와 교회를 재건했다.

이후 뚜렷한 하향세에 접어든 교세, 점점 심화되는 이농현상 속에서 웅동교회의 존재감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선배들이 남긴 믿음의 사적을 간직한 이들의 가슴 속에만 살아있었다. 그러다가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2000년대 들어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건립을 계기로, 광양과 전남 동부 일대 최초 복음도래지로서 웅동이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이다.

2002년에는 한국부활절연합예배 십자가대행진의 출정식이 바로 웅동에서 이루어지고,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예배와 기념탑 건립을 거쳐 2014년 100주년 기념예배당 헌당식이 이어지면서 웅동교회는 어느새 한국교회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자리매김했다. 웅동교회 성도들과 이곳 출신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이며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웅동마을 출신으로 현재 웅동교회를 담임하는 서승석 목사는 “지금도 명절 때가 되면 4~5대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송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게 우리 동네의 풍경”이라면서 “110여 년 전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영광이 다시 이 땅에서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온 교우들과 사역에 정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앙유산 알리는 기쁨 큽니다”
신앙교육 현장으로 발전되길 성원 바라

광양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 선 웅동교회 서승석 목사.
광양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 선 웅동교회 서승석 목사.

인터뷰/ 서승석 목사

“태어난 동네에서 믿음으로 자라고, 바로 그곳에 다시 돌아와 담임목사로 살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서승석 목사는 웅동마을 출신이다. 웅동교회 설립자인 서병준 장로 집안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부터 교회당을 학교처럼, 놀이터처럼 여기며 지냈다. 아버지 서홍석 장로와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 속에서 신앙과 애국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닌 것을 배우며 성장했다고 회고한다.

“추억 속의 옛 예배당 곁에는 무궁화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며 교회 장로님들이 손수 심어두셨던 것이죠. 형제들과 친구들과 늘 그 주위에서 즐겁게 뛰놀던 생각이 납니다.”

웅동교회가 소장한 1970년판 총회사진명감에는 장년 40명, 주일학교 40명이 출석 중이라는 교세보고와 함께 웅동교회 옛 예배당 주변에 전체 교우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고, 사진 속 주인공들 중에는 학생시절의 서승석 목사 모습도 보인다.

결혼 후 고향을 떠난 서승석 목사는 신학과정을 마치고 경기도 안양에서 오랜 기간 목회사역에 전념했다. 그러다 고향 교회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20년 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 웅동교회의 교세는 크게 약해져있었다.

“예배당은 하도 낡아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습니다. 남은 교인이라곤 십 수 명에 불과해, 과연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감도 들었죠. 하지만 교회가 이대로 스러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집안 어르신들과 교우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지요.”

웅동교회에서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던 서 목사의 짐작은 부임 이듬해부터 광양기독교100주년기념관 설립계획이 지역교계에서 추진되며 빗나가 버렸다. 정식 개관과 함께 기념관 관장을 맡으며 건물 관리와 운영은 물론이고, 방문객들을 위한 안내와 해설 그리고 예배인도까지 담당하느라 여러 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져서 광양매화축제 무렵이나 학교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크게 바쁘지 않습니다. 선조들이 일으키고 지켜온 교회를 이어가는 보람으로, 그분들이 이 땅에 남긴 자랑스러운 유산들을 널리 알리는 기쁨으로 남은 목회생활도 채워가려 합니다.”

서승석 목사에게 남은 꿈은 이제는 사진 속 기억으로만 남은 옛 한옥예배당을 복원하는 일이다. 2014년 건립한 현 예배당은 교회 규모에 맞춰 현대식 디자인으로 지은 건축물이라 설립 115년을 향해 가는 교회의 이미지를 채워주기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안팎의 지적이 있어왔다.

“총회에서 웅동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이 이루어진다면 참 반가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마을로 긴 세월을 보낸 웅동마을과 웅동교회가 두고두고 신앙의 산교육 현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의 존재감

광양 최초의 교회로서 웅동교회의 역사적 정통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존재는 교회당 바로 옆에 자리한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광양지역 교회들과 이 지역 출신 기독인들이 힘을 합쳐 2008년 건립했다. 웅동교회에서 시작된 광양기독교선교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꾸며진 기념관 중 지상 1층은 한국기독교역사관으로 복음이 광양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2층은 광양기독교역사관으로 그 복음이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권 일대에 퍼져나간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특히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숨진 양용근 목사,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에게 목숨을 잃은 조상학 안덕윤 목사 등 광양 출신 순교자 3명의 스토리가 역사관의 정점을 찍으며, 다시 이 스토리는 3층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건물 밖에는 세 순교자들의 추모비와 광양선교 100주년 기념비 등 복음의 발상지로서 웅동마을의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들이 웅동교회당과 마주하고 있다.

전시실들과 함께 150~2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강당과 식당 숙소 등이 함께 갖춰져, 교회 단위의 수양회나 세미나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기념관 건립 이후 가까운 영호남지역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탐방객들이 이 공간을 찾아와 선교역사와 순교정신을 배우고 돌아갔다.

인근에는 어치계곡, 광양 매화마을, 하동 화개장터 등 여러 명소가 자리 잡고 있고, 순천 매산과 여수 애양원 등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유적들이 지척에 있어 광양선교100주년기념관을 거치는 순례와 관광일정을 다채롭게 계획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방문자들의 감소로 운영과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웅동교회와 100주년기념관의 가족들은 복음의 샘물을 곳곳으로 흘려보낸 작은 산골마을을 찾는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여전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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