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뜨거운 소명을 갖고 신학대학을 간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교회 사역을 하면서 그런 확신이 더 커졌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목회자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이 확신은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아시고 하나하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보면서 더 커졌다.

월간 <생명의 삶>의 전신인 <생명의 양식>을 통해 나는 문서선교 사역의 첫 발을 뗐다.

하나님은 전도사 시절 나를 문서 선교사로 각별하게 사용하셨다. 그때 나는 신학대학원을 야간반으로 다녔다. 당시 신학대학원 등록금이 60만원 정도였는데, 10~20만원하는 교육전도사 사례비로는 생활비와 학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가능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이전까지 중고등학생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던 나는 두란노서원에 원서를 냈다. 그 무렵 두란노서원은 월간지 <빛과 소금>과 그 부록으로 <생명의 양식>이라는 QT묵상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내가 지원한 분야는 바로 그 <생명의 양식> 편집자를 뽑는 자리였다. 면접을 보러 갔더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이 계셨다.

하 목사님은 나에게 몇 마디 묻더니 작은 영어책을 하나 주면서 번역해 오라고 하셨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던 터라 영어 사전을 찾아가며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책을 번역했다. 하 목사님은 번역한 원고를 보시더니 맘에 들었는지 ‘내일부터 출근하여 일을 하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 목사님은 번역 실력보다는 문장력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생명의 양식>을 맡아 두란노서원에서 만 5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을 시작할 당시 2만부를 발행하던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 은혜로 발행 부수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10만 부까지 판매됐다. 그 후 <빛과 소금>에서 독립하며 <생명의 삶>이라는 별도 월간지로 등록하기도 했다.

문서선교 사역은 부목사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옥인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면서 <생명의 삶> 편집장을 그만두었다. 옥인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나를 아셨는지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께서 친히 전화를 주셨다. 교회에서 주간 신문을 만들려는데 내가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당시에는 기독교 출판 경력자가 많지 않았을 뿐더러 목사 신분의 경력자는 더 드물었던 터라, 길 목사님은 물어물어 내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길 목사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옥인교회 교인들과 쌓은 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옥인교회 고 김영철 목사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은 내가 더 좋은 조건이 생겼다고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길 목사님께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교회를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길 목사님은 파트타임으로라도 도와달라고 다시 부탁하셨다. 다행히 옥인교회 교역자들이 쉬는 월요일에는 일을 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3년 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왕성교회에서 교회신문 만드는 일을 했다. 4면으로 구성된 교회 신문은 매주 5만부를 찍어낼 만큼 호응이 좋았고 전도용으로 많이 뿌려졌다.

그 후 담임목회를 시작하면서도 교회 신문을 만들었고, 지금도 <옥수중앙뉴스>란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신경이 꽤 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또 다른 달란트라 여기며 글을 쓰고, 편집하여 꾸준히 내놓는다. 신문에는 내가 목회 사역 가운데 느끼고 경험한 여러 일들을 나누는 한편 교인들의 삶, 교회의 이모저모 섬김 활동 등도 싣는다.

특별히 옥수동과 금호동에 사는 작은 이웃들의 사연을 자주 싣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낮고 약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교회신문에서만큼은 그들이 주인공이 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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