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혁신학과 예배회복

최근 한국교회가 예배의 본질을 잃고 탈성경적 예배를 따르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개혁주의 신학의 예배가 이미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질도 거론되고 있다. 말씀을 전할 때 영적으로 무장을 갖추지 않은 채 강론을 선언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자들도 많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지영육을 제대로 교육하여 훌륭한 목회자를 양성하는게 목적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개혁주의 신학은 논한다는 주제로 재점검 하면서 신학자와 전문 목회자 5명의 글을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개혁신학과 예배회복

 

 

김근수 목사(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목사(칼빈대학교 총장)

한국교회의 예배와 그 바른 방향에 대해 염려하는 분들이 많다. 워필드(B.B. Warfield)가 바르게 말한 대로 예배는 성화의 궁극적인 이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지 윤리적인 인간을 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예배자로 만들어 영원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고자 하는 뜻에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옳다. 이 같은 구원의 목적을 고려할 때 예배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분명 예배의 본질과 원리는 불변하지만 예배의 양식에는 역사적 상황과의 교감이 존재한다. 지역과 문화 그리고 시대의 변천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와 감사를 표하며 찬양 드리는 양식은 역동적으로 거듭 변하고 있다. 그렇기에 예배의 형식적 원리를 어떻게 구현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단지 한 시대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항구적인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의 통일된 그리고 확고한 예배모범을 따르지 않고 있다. 이에는 교단의 차이가 불문하다. 가깝게 우리 교단만 살펴보아도 헌법이 예배의 모범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실제 교회의 예배에서는 그다지 존중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시되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런 상황 속에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 경배와 찬양,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 등이 탈현대사회(Post-Modernism)의 새로운 예배 대안으로 등장하여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교회들은 제각각 필요성과 자각 및 자의적 판단에 따라 새로운 예배양식과 사적인 다양한 고안(考案)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외인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만큼 거의 모든 교회가 기존의 성경적 예배 현상을 벗어난, ‘탈성경적 예배현상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을 하겠는가? 이러한 현상이 계속 될수록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상기하고 그 바른 양식을 정립하는 일을 시급히 다뤄야한다. 깊이 파고들어 몰두해야 한다. 동시에 새로운 예배 형태의 기원과 의도 그리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중심의 예배에서 개혁된 모든 교회는 개혁주의적 신학 전통을 반영하는 다섯 가지 예배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개혁주의 예배성경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중요시 하여야 할 필수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신앙고백

일정하게 고정된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필수적 교리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교회의 권위를 재가(裁可)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기독교회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던 공동체이다.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규정된 복음적 진리체계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명확한 예배예식과 신앙 규범(고후9:13, 1:27)을 갖추고 있고 엄격한 회원 자격(고전5:3-5, 딤전1:19-20, 요이9-10)과 교리에서 벗어날 때 징계조치를 시행했던(고후2:5-11) 예배 공동체를 조직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신경들과 고백들은 유사한 어떤 완전한 구조의 것이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되지는 않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한 교리적 내용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도가 주께 받은것이며, 교회에 전하여 준것이다(고전11:23). 또한 이 사도적 신앙은 직접적으로 혹은 다른 충성된 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회에 계승되었다(딤후2:2). 특히,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주께 받은 것은 직접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말함이다(1:12).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다”(고전 15:3,4)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독자성을 주장하며(1:1, 11-12), 다른 사도들의 복음에 대하여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한다(2:6, 11-14).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복음은 모든 전승에 우선한다. 초기 기독교회에 있어서 빈번히 반복되는 한 신앙고백은 도마의 고백으로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간명한 진술이다(20:28, 10:9, 고전12:3, 고후4:5). 바울이 이 진술을 신앙고백으로 역설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하였고,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15:2)고 한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근자에 이르러 신앙고백 없이(생략) 찬양하다가 설교에 임하는 교회들이 늘어나는 것은 개혁주의 예배모범에서 멀어지는 현상이다. 신앙고백은 복음의 핵심적 사건을 반복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신앙지식의 향상과 믿음의 정도로 나아가게 함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2. 찬송시와 신령한 노래들

바울의 서신들 속에는 기독교적 찬송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 14:26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라고 했으며, 15절에는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하여 찬송시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골로새서 3:16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으며, 에베소서 519, 20절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하여,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바울 사도는 교회에 찬송을 권면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직접 찬송을 하는 자였다.

바울의 서신에는 유대적 기독교 찬송의 그룹에 속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와 긍휼과 지혜를 논증한 바울은 경이에 가득한 찬양을 올린다. 로마서 11:33-36은 바울이 이미 존재하는 찬양을 전수받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바울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같은 찬송들은 그 내용으로 보아 예배와 관련이 깊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바울사도는 지나치게 예배자를 기쁘게 하는 찬송보다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높이는 찬송들이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찬송으로 사용하고 있는 복음송들이 그저 사람들이 즐기기만 하는 복음송은 아닌지 고찰해야 한다. 예배송이 아닌 노래들은 개혁주의 예배의 근본인 하나님 면전의식(코람 데오)을 약화시킬 뿐이다.

3. 기도

바울은 뛰어난 기도의 사람이었다. 회심한 후의 바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요점들 중의 하나는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9:11)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명하였다. 서신서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는 대략 33군데나 된다. 한결같이 그의 기도는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중점을 공동체에 두고 말함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속에 개인적 특성을 배제하고자 함이 아니다.) 훌륭한 개인의 기도 모범은 공동체를 통해 발전해 왔기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공동체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 자신이 고린도전서 143-5절에서 하나님께 방언을 말하는 자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음을 분별치 못하여 어떤 악기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나팔 소리가 분명치 못하여 전쟁을 예비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바울의 기도는 교회적 유익을 매우 강조하고 있기에 교훈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에서 바울의 서신서들을 낭독할 때면 그의 기도의 내용이 그 자리에 모인이들에게 함께 공유되어 하나의 교육적 모범이 된다. 이에 비하여 한국교회의 기도는 성령의 은사 특히 치유와 기복신앙적 축복에 치우쳐서 예배 공동체적 성격이 죽어가고 있다. 우리 교회들은 신앙공동체 속에 건덕과 질서가 기도로써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조심해야 한다.

4. 설교와 가르침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목회 핵심사역을 설교와 가르침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특히 성경에서 바울의 설교의 본문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적어도 사도행전에만 8개를 찾아 볼 수 있다.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설교가 실제 바울의 설교와 얼마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가? 누가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면서 바울의 문체, 어휘, 기술 등을 그대로 재생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누가의 기록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와 서신서들의 어구는 상당히 유사성이 많다는 것을 들어 누가가 바울의 설교를 집약적이고 요약적으로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누가의 기록에서 보는 바울의 설교는 상황과 청중에 따라 각각 다른 접근을 취하였다.

청중이 유대인인 경우에는 권위로서 성경의 사용함, 일반적인 신학적 전통(옳을 때)과 문화적 전통을 동일시함, 권위로서 세례 요한을 사용 하였고, 이방인을 향한 그의 사명 말하기를 보류하고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이해, 개인적인 간증과 호소였다. 반면에 청중이 이방인인 경우에는 일반 계시 사용, 종교적인 관심에 대한 해설과 언급, 헬라의 시를 인용, 가까이 있는 환경을 이용, 청중에게 적합한 설교와 가르침을 주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청중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가진 설교자였다. 그는 청중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황을 직시하여 그의 메시지가 정확히 설교 청중을 감동케 하였다.

특히 바울사도의 설교와 교훈의 중심은 복음이었다.

예언대로 다윗의 씨인 그리스도의 오심(1: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심(고전 15:3),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심(고전 15:4), 그리스도의 승귀(1:9), 그리스도의 재림(1:11)등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은 복음의 핵심 5대 교리에 있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바울의 설교 사역이 그의 교회에 사도적 신앙을 전수함에 있어 대단히 복음적이라는 강력한 증거임에 틀림이 없다. 설교가 복음적 강조보다 도덕적 실현(Morality)에 집중하는 것은 건강한 설교일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개인적인 간증을 여러번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간증한 곳은 고전9:1, 15:8-10, 1:13-17, 3:4-11이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롬10:2-4, 고전9:16-17, 고후3:4-4:6, 고후5:16, 3:1-13을 여기에 더하고 있다.

우리가 다룰 것은 왜 바울이 이토록 자신의 회심을 되풀이하여 간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야기를 각 교회로 보내는 서신에 넣어 위와 같은 진리들을 교회에 교육하는 자료로써 사용한 것이다. 간증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보다는 개인의 성공담과 어연중에 자신의 탁월성 자랑으로 일색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의 회심 이야기는 그가 교회에 자신의 사도직과 사명만을 주장하는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의의 복음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로 말미암는 영생과 새 창조와 같은 진리들을 설파하는 원천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5. 성례(세례와 성찬)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바울서신들에서 나타난 성만찬에 대한 기록이다.그는 성만찬에 대한 교훈에 관하여 이것이 주께 받은 것”(고전11:23)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성만찬에 대한 자신의 교훈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의 전통 혹은 전승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마가의 기록(14:22-25)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가 첨가되어졌다. 마가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고 하였는데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로 바뀌었다. 또한 막 14:24절의 종말론적인 말씀은 바울에게서 주가 오실 때까지라는 형태로 축소되었다. 이와 같이 마가의 기록과 바울의 것과 다소간의 강조점의 차이는 마가에 기록된 예수님의 전승이 바울에게서 초대 교회의 성만찬의 의식적인 재현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성만찬에 대한 교훈의 내용은 무엇인가?

본질적 내용으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6). 그리고 적용적 내용으로 자기를 살피고 주의 만찬에 참예하라(11:27-28),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11:34)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고린도교회가 성만찬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11:17, 33), 바울의 언급이 단순히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고린도교회의 성만찬 교리를 체계화하려는 계기를 마련하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성만찬의 혼란을 고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34절 끝에 바울이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후에 무엇을 가르치려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 만찬에 관계된 것이라고 짐작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바울이 성만찬에 대한 전승을 단지 전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의 실천적이며 창조적인 첨가를 하여 성만찬에 대한 의식적 제도를 확립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비단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이 서신을 회람하는 모든 교회에게 성만찬의 의식제도 수립에 적지 않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탈성경적 의식을 초월해야 되는 성만찬의 중요한 예배모범이 될 것이다. 바울이 성만찬을 교육의 아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유아세례는 개혁주의 입장은 스스로의 범죄함이 없는 젖먹이 경우는 스스로의 신앙고백없이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대치되는 가정구원(Household Salvation)의 원리(11:14, 16:31)에서 진행 되어야 한다. 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찬에 참예하는 것을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세례를 받지 않은 교인을 성찬에 참예 시키는 일은 적절치 않다.

오늘날 적잖은 교회들이 말씀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말씀보다는 신유에, 축사(축귀), 인간의 기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에, 동질 계층의 코이노니아(교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말씀의 자리는 밀리고 말씀의 시간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말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도 본래적 계시의 의미와 정신에서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고 있다.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추종한다고 하면서도 신학과 신앙과 생활이 특히 예배 모범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Man-Centered-Service)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예배(God-Centered-Worship)로 예배의 방향 회복이 절실하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제 말씀 중심, 신령한 찬송, 공동체를 위한 기도 그리고 건전한 성례가 회복되는 개혁교회의 예배로 돌아가야 산다. 예배가 살아야 설교자도 살고 교회도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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