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장로회정치, 교단혼란 원인 제공 … 1년 주기 ‘총회만능주의’도 한몫
과도한 권력집중 막는 시스템 중요 … “총회 존재 이유와 가치 명확히 하라”

총회는 ‘정치 종착역’ 아닌 ‘발전적 플랫폼’ 돼야 한다

“총회는 정치하는 곳이다.” 맞는 말이다. 총회헌법이 보장하는 것이며, 태생적으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정치는 필수적이다. 정치적 동물, 그 중에도 150개 노회에서 날고긴다는 이들이 모이는 총회 현장은 정치의 정점일 수밖에 없다.

교단이 지향하는 정치는 <총회헌법>에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장로회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예장합동 <총회헌법> 정치 총론에 나오는 장로교정치의 정의다. 헌법에는 장로교정치를 성경적 제도요, 교회 역사로 보더라도 가장 오랜 역사와 항상 우위를 자랑하는 제도라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 주권을 행사하기에 장로교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장로교정치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기에,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의 교황정치와 다르고, 감독정치를 따르는 감독교회 및 감리교회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장로교회 정치에서 주권이 총회가 아니라 교단 산하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에 있다는 것은 정치의 출발점이자 목적이 ‘교인의’, ‘교인에 의한’, ‘교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교단은 소속 교인을 살리고, 주권을 가진 교인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보호하고 부흥성장케 하기 위해 정치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지금 교단에서 통용되는 정치개념은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 왜곡된 정치를 악용하는 수준이 도를 넘고 있다.

‘정치실종’ 아닌 ‘정치왜곡’
많은 이들이 총회정치가 실종됐다고 푸념한다. 정치실종을 긍정적으로 분석하자면,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과 발전을 추구하는 순기능의 정치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총회에 정치가 실종했다는 말에는 적당한 타협과 봐주기가 없으니 소란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정한 일을 저지르거나, 교단에 손해를 입힌 장본인이 명백함에도 온갖 방법으로 버티기에 들어가면 어느 순간 치리는 온데간데없다. 어느새 지역갈등 또는 진영논리에 빠져 교단은 특정 문제로 인해 혼란에 빠져버리기 일쑤다.

교단의 이러한 못된 습성이 먹혀들면서 교단이 상처를 받든, 교회가 풍비박산이 나든 아랑곳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총회정치에 오랜 기간 몸담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강한 법이다. 그렇다보니 편향적인 정치로 흐를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특히 재판과 감사와 같은 중요 요직에 편향적인 정치개념을 가진 인사가 들어갈 경우 혼란을 야기하는 사례는 무수하게 목격해 왔다. 오죽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처럼 정상적인 절차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손해보고, 편법을 이용한 사람이 이긴다는 푸념이 나올까.

소위 ‘큰정치’의 실종도 문제다. 교단과 교회를 살리고, 영적으로 유익을 주는 일이라면 기꺼이 손해보고 양보하는 정치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현재 교단에서 정치 깨나 하는 사람의 면면을 보면 공공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자리, 목표했던 직책을 갖기 위한 통로 찾기에 급급한 소아적인 정치행위를 보이는 사람이 허다하다.

총회장을 지낸 서기행 목사는 “과거에는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총회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했는데, 지금은 개인의 이익에 붙들려 편협한 결정을 하는 풍토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총회가 끝나면 사건만 터진다”고 지적했으며, 장차남 목사 역시 “큰정치를 하려면 좁은 안목에서 자리 주고받는 일에 집중하면 안 된다. 교단을 멀리, 넓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총회 정치는 장로회 정치다. 수장에게 절대 권력이 쥐어지는 로마가톨릭도 아니고, 특정 세력에게 권력을 주는 집단지도체제도 아니다. 장로교회의 정치는 <헌법>에도 명시된 것처럼 민주주의 정치다. 이 개념을 망각하면 총회 정치는 왜곡되고 멍들게 되어 있다.
총회 정치는 장로회 정치다. 수장에게 절대 권력이 쥐어지는 로마가톨릭도 아니고, 특정 세력에게 권력을 주는 집단지도체제도 아니다. 장로교회의 정치는 <헌법>에도 명시된 것처럼 민주주의 정치다. 이 개념을 망각하면 총회 정치는 왜곡되고 멍들게 되어 있다.

총회만능주의 타파 시급하다
총회가 다가오면 이구동성 하는 말이 있다. “이번 총회 이슈는 뭐지?” 이처럼 교단 정치가 왜곡되고, 나아가 극도로 정치화된 데는 분명 원인이 있다.

우선 ‘총회만능주의’를 꼽을 수 있다. 정치에 맛들인 인사들이 곧잘 하는 말이 있다. “총회때 두고 보자.” 이 말에는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거나 방해가 되면 총회 전에 정치력을 총동원해 정치적으로 죽이거나, 특정사안을 뭉개버리겠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총회 기간만 잘 버티면 1년은 무사히 활동할 근거로도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말이다.

실제 교단의 1년 살림은 고작 5일간의 총회현장에서 결의된 범주 안에서만 돌아간다. 복잡다단하고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총회 파회 이후 유연한 활동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5일의 결정이 360일을 좌우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360일 교단 핵심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한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특정 그룹이 자신들의 사람을 심으려 발악하는 정치쇼가 벌어지는 것이다.

교단이 정치적 사안에만 관심을 갖는 이유는 패거리 정치도 한몫을 한다. 오랜 기간 총회에서 활동한 한 인사는 “패거리 정치가 우리 교단을 정치화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슈가 많아야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가 쉽다. 이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침묵하는 다수의 총대 잘못도 크다. 밋밋한 안건보다 민감한 정치 사안에만 관심을 보이다보니 분위기에 편승하고, 이를 이용해 먹는 브로커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인사는 대안으로 노회의 순기능 회복을 꼽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총회가 건전한 안건을 토론하고 발전적 대안을 찾는 장으로 변화되려면 풀뿌리인 노회가 건강해서 좋은 안건을 상정해야 하는데, 노회 현실을 보면 총회 축소판이다. 노회에서도 사람 잡고, 이슈를 따라가고, 재정이 불투명하고, 보스정치가 판 치고 있지 않은가.”

과도한 권력 집중 막아야 한다
총회만능주의는 결국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물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 있는 많은 총대들은 지금의 교단 정치는 장로교정치가 아니라 교황정치 내지는 감독정치라 비판한다. 과도하게 총회임원, 특히 총회장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 따른 것이다. 총회장을 역임한 이들은 여기에 반론을 펼 수 있다. 총회 수임사항이 아니면 총회장이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거의 전무하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총회임원회 등 각종 회의와 모임에서 총회장의 입김은 가히 절대적인 것은 사실이다.

국내 대표적 보수교단인 예장고신도 이 부분에서 고민이 큰 듯 보인다. 예장고신은 이번 총회에 유안건으로 ‘총회장 제도에 관한 개선을 위한 제안’이 올라와 있다. 총회장과 사무총장의 책임이 나뉘어 있는 네덜란드 장로교회를 따르자는 내용으로, 총회장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헌법과 총회규칙을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핵심은 먼저 총회장의 지위와 직무를 ‘총회 업무와 산하기관을 총괄 한다’에서 ‘총회기간 중 총회의 제반 업무를 관장한다’로 바꾸고, ‘필요시 각 법인 이사회 및 각부, 위원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에서 ‘총회 폐회기간에 위원회에서 요청 시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로 수정하자는 내용이다. 반론으로 교단 중심인 한국 상황에서 총회장 제도를 변경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맞서 있는 상황이다.

총회장 못지않게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도 많다. 어느 회기나 핵심요직에 특정인들이 자리를 꿰 차고, 총회결의를 왜곡 적용하거나 심지어 총회장을 비롯해 총회임원들을 좌지우지하는 경험을 익히 한 바 있다. 지금도 드러나지 않으면서 총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권력집중에는 회전문 인사도 큰 몫을 차지한다.

전현직 총회임원들은 매년 5월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기점으로 총회임원 흔들기가 시작된다고 입을 모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임기 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등이 도를 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로 인해 바르게 결정해야 할 부분도 타협해서 넘어가거나 심지어 어떤 일도 못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건전한 정치 시스템 마련이 해법
공룡화된 거대 교단의 탈정치화와 권력집중을 분산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회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있다. 대회제를 실시하면 총회 정치판이 작아져 총회만능주의와 권력분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쟁점은 대회에서 하고, 총회는 정책과 선언적 결정만 하게 되면 교단 이미지 개선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무지역노회가 많은 현실에서 대회제 실시는 여전히 요원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교단이 유익을 얻고, 궁극적으로 풀뿌리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방향성과 안정감을 주는 선이 굵은 정치는 불가능한 일일까.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들이 ‘방향성’과 ‘사람’이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교단이 나아갈 방향성을 선명하게 설정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대의 안목과 교단 발전을 위한 방향성을 선행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사람을 세우되, 이들의 사상과 경험, 달란트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건전한 대안을 가진 인사들을 등용하는 일에 교단이 소극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총회현장이 정치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발전적인 안건을 다루도록 노회가 투명한 절차를 통해 헌의안을 제출해야 한다. 애매한 결의를 지양하고 가급적 총회현장에서 명료하게 결론짓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차제에 유수의 해외 교단처럼 안건을 미리 공유하고 연구해 총회 때는 찬반만 묻고, 실질적으로는 신학적 대안을 모색하고 선언하는 총회방식으로 가도록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있다. 총회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명확하게 각인하는 생각이다. 총회가 산하 교회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최대한 교회를 살리고 성도들의 신앙을 돕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건강한 정치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총회는 ‘종착역’이 아니라 ‘플랫폼’이라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마지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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