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글쓰기’와 ‘말하기’였다. 작문시간만 되면 고민이 컸다. 나는 글을 잘 못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든 자치활동 시간이든 먼저 손들고 질문하거나 발언한 기억은 전혀 없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데는 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절할 수 없는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던 기억뿐이다.

그런 나는 말하기나 글쓰기는 포기한 채 ‘듣기’와 ‘읽기’에 집중했다. 마음에 와 닿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더 집중해서 들었다. 아울러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읽기에 집중한 나는 꽤 독서량이 많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때 읽은 책들은 문학작품만은 아니었다. 현재는 100세가 되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나 박학한 이어령 교수, 그리고 생각을 키워준 안병욱 교수의 책까지 참 다양한 책들을 접했다. 그 중 몇은 아직도 내 서재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읽은 책들과 그 내용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가 목사가 되고나니, 글쓰기와 말하기는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색해 하거나 힘들지 않게 그 작업을 해내고 있다. 가장 못하던 것이었는데, 그것이 나의 평생의 일이 되었고, 또 그렇게 못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못한다는 말도 듣지 않으니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넘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누구나 지금은 못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영 못한다는 법은 없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든가, ‘지금은 따라오지 못해도 후에는 할 수 있다’는 주님의 격려를 받았다.(요 13:7, 36)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되었다. 도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세월이 지난 후 그는 해내고 말았다.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말 잘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결국 말을 잘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잘 듣는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비결도 잘 읽는데서 찾아야 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데 어찌 말하겠는가? 읽은 적이 없는 글을 어찌 써낼 수 있겠는가? 듣기와 읽기, 이것은 말하기와 글쓰기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러기에 말하는 입과 잘 써내는 손보다는, 잘 듣는 귀와 잘 읽어낼 눈이 더 간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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