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신앙 전통 기반, 강력한 공동체 지키다
일제강점기ㆍ한국전쟁 혼란 속에도 믿음 행보 튼튼 …“자랑스런 역사 기억과 보존 진력”

대구 동편 고을들을 한 데 묶어 선인들은 반야월이라 불렀다. 새벽녘이면 둥실 떠오른 어여쁜 반달이 두루 비추며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동네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100여 년 전 이 동네에는 은은한 달빛처럼 포근한 은혜의 복음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곳 사람들이 세운 신앙공동체는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 신기교회로, 예배당을 옮긴 후에는 동호교회로, 나중에는 아예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을 가져와 반야월교회(이승희 목사)로 정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갖은 시련을 견뎌내며 탄탄한 공동체로 자라온 반야월교회의 예배당 전경.
갖은 시련을 견뎌내며 탄탄한 공동체로 자라온 반야월교회의 예배당 전경.

반야월교회의 서막은 아담스(한국명 안의와)와 맥팔랜드(한국명 맹의와) 등 미국북장로교 대구선교부 선교사들이 열었다. 이들은 대구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사월교회를 거쳐 달구벌 동쪽에서 맹렬히 복음을 전하며 계속해서 교회를 세웠다. 걸어서 혹은 당나귀를 타고 찾아와 전도하는 선교사들과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그 중에는 신기동에서 살던 김강릉 이정우도 있었다. 한 동안 사월교회를 다니며 믿음을 키우던 이들은 자신의 동네에서 열심히 전도해 사람들을 모은 후, 1905년 초가삼간 한 채를 사들여 붉은 십자가 깃발을 높이 달고 교회당으로 삼아서는 함께 예배하기 시작했다.

반야월교회 114년 역사를 보여주는 프라미스역사관 내부 모습.
반야월교회 114년 역사를 보여주는 프라미스역사관 내부 모습.

설립 초창기에는 주일 아침이면 예배당 앞 돌담 위에 교인들이 준비해 온 대나무 도시락통과,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이들의 기다란 연죽 등이 쌓여 독특한 풍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앙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으며 교회 안팎의 풍경이 바뀌었다.

특히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교회당을 증축해야 할 상황이 되자, 마을에서 우상처럼 받들던 당산나무마저 서슴없이 베어내는 결단까지 내렸다. 하지만 이 일로 반감을 가진 이들로 인해, 교회 대표들이 하양의 군수에게 불려가 모진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첫 번째 난관이었다.

반야월교회는 마치 인동초처럼 온갖 시련을 견뎌내며 자란 공동체였다. 3·1운동 당시에는 서성오 목사와 훗날 장로가 된 송원재가 만세시위에 앞장서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크고 작은 탄압에 시달리는 중에, 해방 직전에는 교회당 폐쇄조치가 내려져 교우들이 비밀리에 모여 예배하며 견디는 암흑기도 보냈다.

1955년 반야월교회 50주년 기념예배 당시의 풍경.
1955년 반야월교회 50주년 기념예배 당시의 풍경.

한국전쟁 때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전투에 참가했던 교회의 어린 학생 20여 명 중 겨우 두 사람만 살아 돌아오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온파라 불리는 이단의 출몰로 교인들 여럿이 미혹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확장해나가는 반야월교회의 행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성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도에 열을 올렸고, 복음은 마치 들불처럼 인근 동네들로 힘차게 번져갔다. 1935년 각산기도실을 시작으로 율하기도실(1940년) 금강기도실(1943년) 매여기도실(1951년) 등이 잇달아 설립됐고, 이들 대부분이 훗날 정식 교회로 성장했다.

다음세대 사역은 반야월교회가 가장 혼신을 기울인 분야였다. 1908년 계남학교 설립이 1917년 개량사숙 설립으로 이어지며, 젊은이들에게 애국신앙을 불어넣고 이들을 조국과 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로 키우는 역할을 해냈다. 경영상의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교사들을 비롯한 온 교우들이 협력하며, 오랜 시간 일대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앙과 권징의 시행으로 교회의 질서를 잡아가는 전통은 반야월교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지탱해주는 힘이 됐다. 그리하여 이단의 공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맞서 싸우며 영적인 권세를 발휘할 수 있었고, 잇따른 교단 분열의 혼란 속에서도 주변의 형제 교회들과 함께 우리 총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꿋꿋이 지켜냈다.

반야월교회의 오랜 발자취를 보여주는 등사기와 철필로 제작된 찬양악보.
반야월교회의 오랜 발자취를 보여주는 등사기와 철필로 제작된 찬양악보.

1994년 부임한 이승희 목사는 이처럼 탄탄한 기반 위에 선 교회를 더욱 강력한 공동체로 변모시킨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 교세가 10배 이상 괄목할 수준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지역은 물론 한국교회 전체에 도전이 되는 참신한 복음사역들이 속속 개시됐다. 최근엔 제100회 총회와 103회 총회의 잇따른 유치, 이승희 목사의 총회장 취임이라는 엄청난 경사도 있었다.

반야월교회의 자랑스런 역사는 지난해 건립된 프라미스역사관에 잘 정리된 모양으로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시대별 사건과 인물들을 소개하는 자료들과 함께, 오래전 사용한 풍금과 등사기며 철필로 제작한 찬양악보 등이 정겨움을 자아낸다. 당회 서기 손창호 장로는 “앞으로 전시자료를 더 보강해 대구·경북지역 선교역사를 함께 담는 공간으로 만들 방침”이라고 밝힌다.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그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겠다는 이승희 목사와 교우들의 다짐은 이 시점에도 유효하다. 지금까지의 반야월교회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기에 써내려갈 역사는 그러므로 더 큰 기대를 품게 만든다.

“믿음의 세월과 저력이 큰 동력”
신앙전통 계승 힘써 ‘위대한 교회’ 로 비상

인터뷰/ 이승희 목사

“반야월교회의 114년은 단순히 오랜 세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역사, 신앙의 계승을 보여줍니다. 초가삼간에서 시작된 한국기독교회사의 태동기 교회인 동시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믿음의 산실 역할을 해 온 존재로서 말입니다.”

반야월교회 이승희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교회 설립자인 안의와 선교사의 후손들과 함께 한 모습.
반야월교회 이승희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교회 설립자인 안의와 선교사의 후손들과 함께 한 모습.

이승희 목사는 제25대 담임목사로서 반야월교회를 25년간 이끌며 총회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신앙공동체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의와 선교사, 이정우 영수를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이 쌓아온 자랑스러운 세월과 저력들이 작용한다고 밝힌다.

“이 소중한 역사를 보존하고 기억하기 위해 2015년에는 ‘한 알의 씨앗이 옥토에 떨어지다’라는 제목으로 100년사와 화보집을 출간했고, 2018년에는 프라미스 역사관을 건립했습니다. 매년 교회 설립주일을 전후하여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면서 지역주민과 성도들에게 반야월교회의 역사를 알릴뿐 아니라,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이 보여준 숭고한 희생과 헌신의 본을 따르기 위해 해외 선교는 물론 국내 농어촌 미자립교회에 대한 지원과 목회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및 봉사활동 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승희 목사는 설명한다. 그리고 탄탄한 과거의 기반 위에 더욱 새롭고 힘찬 미래를 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도 다짐한다.

“보존(preservation) 발전(progress) 준비(preparation)는 각각 반야월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을 상징하는 ‘3P’로 축약됩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중에도 복음이 퇴색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잘 계승될 수 있도록, 단순히 ‘주목 받는 교회’를 넘어서 ‘위대한 교회’로 비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명령’을 ‘위대한 헌신’으로 성취하는 교회로 더욱 자라나겠습니다.”

헌신적 섬김의 표본, 이정우ㆍ송원재 장로

반야월교회 강단을 지킨 역대 담임목사들 못지않게, 이들을 뒷받침하며 조사 영수 장로 등의 이름으로 섬긴 지도자들이 교회역사 속에 그리고 성도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정우 장로와 송원재 장로는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들이다.

이정우 장로
이정우 장로

초대장로인 이정우 장로는 반야월교회를 일으킨 인물들 중 한 명이자, 영수로서 교회의 기틀을 놓은 일꾼이었다. 초창기 교회가 관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대표로 끌려가 문초를 당하고, 동네 서당을 인수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개량학교를 세울 때 초대교장을 맡아보는 등 그의 활약상은 교회사 곳곳에 등장한다.

생업으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자기의 일은 부업으로 여기고 교회봉사와 교육사업을 본업으로 여길 정도로’ 교회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이 장로의 이 같은 모습은 그의 뒤를 이어 반야월교회 장로직을 수행한 이들에게 귀감이자 지표로서 큰 역할을 한다.

송원재 장로
송원재 장로

송원재 장로는 반야월교회가 세운 계남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영수로서 그리고 제4대 장로로서 교회의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한 동안은 조사로서 경산지역 5개 교회를 담당해 돌보기도 했는데, 엿으로 끼니를 때우며 먼 길을 걸어 사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교회에서 ‘믿음의 아버지’로 여겨지던 송 장로는 애국신앙도 투철한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자금조달 역할을 맡고, 일제에 수감되어 고초를 당하는 등의 이력으로 대구경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인 애국지사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계남학교 교사 시절에는 조선의 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학생들에게 고취시켰고,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폐쇄되는 시련기에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성도들을 모아 예배를 이어가며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1918년 병원을 개원한 후 의사로서도 신앙양심을 기반으로 인술을 베풀며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전염병이 지역을 휩쓸 때면 돈 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무료진료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수시로 찾아가 아낌없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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