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귀석 목사(주평강교회)

수 많은 갈림길서 기도하면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 27:1)

정귀석 목사(주평강교회)
정귀석 목사(주평강교회)

모든 인생은 수많은 갈림길을 만납니다. 언제 해야 하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누구를 만나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순간순간 만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 때에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갈림길에서 제대로 판단하고, 제대로 결정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생각할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오늘 성경에 보니 인생의 늪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다윗입니다. 다윗이 궁지에 몰렸을 때 직면한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명예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다윗입니다. 분노로 나발을 죽일 뻔했는데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설득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던 다윗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시험과 유혹 속에서도 승리한 것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승리 이후에 안타깝게도 생각의 늪에 빠져버립니다. 본문 1절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고 시작하는 것을 보십시오. 다윗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겁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 그를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너무나 힘들고 지친 도망자로서, 그리고 많은 식솔을 거느린 자로서 현실을 바라보니 하나님을 놓치고 생각에 빠집니다. “내가 곧 사울의 손에 붙잡힐 것이다.” 매우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블레셋 땅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러면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일시적인 안식을 먼저 생각합니다.

다윗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그 마음에 생각대로 결정합니다. 다윗이라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도하기를”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때 다윗은 마음의 생각이 이끌어가다 보니 영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생각을, 영원한 것 보다 일시적인 안일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에 생각을 고정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크게 보입니다. 물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람을 더이상 믿을 수 없고, 가족과 식솔들에 대한 염려가 점점 더해지고, 사무엘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버팀목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자의 신세는 끝이 보이지 않으니 사는 게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그래서 내 생각이 앞서게 되고 조금이라도 쉬운 쪽을 택하게 됩니다. 결국 국경을 넘어 블레셋에 망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도했으면 결정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다보니 왕으로 세워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이 광야가 왕의 수업을 받는 곳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쉽게 걸려드는 사탄의 전략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집중하게 하고, 합리화시키고, 타협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생각은 현실적인 필요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 사로잡히면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문을 외우듯 내 생각을 강요합니다. 하나님을 조종하려고까지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풀어야 할 현실이 있고,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 두렵고 답답할지라도 기도할 때 너무 내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도는 나의 필요를 아뢰지만 내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절하시는 것도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다리라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현실만이 보이고, 경험에 근거해서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은 다윗의 비참한 신세와 타협과 16개월의 불순종의 시간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내 생각의 늪에 빠져 있으면 낙심하고 마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참담하게 느낍니다.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만 보입니다. 태양이 나를 왜 비춰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태양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림자는 그냥 사라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에 갇혀 하나님을 등지면 참담해집니다. 점점 늪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내 생각이라는 것은 내경험, 현실적 필요, 객관적 환경에 근거하여 판단하기에 꽤나 정확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 중심이니 확실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기도는 내 생각을 바꿉니다. 문제를 보는 관점을 달라지게 합니다.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면 너무나 인간적이고, 세상중심적으로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태아의 탯줄과 같습니다.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합니다. 그러기에 어려울수록 기도의 반석 위에 서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광야인가? 시글락인가?

다윗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갑니다. 이 결정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다윗이 아기스의 신하가 됩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장은 사울의 손에서 벗어납니다.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깁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깊은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사무엘상 27장 8~12절을 보면 거짓말을 합니다. 이민족을 정벌하고서 유다를 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기스는 더욱 다윗을 신뢰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어렵게 꼬입니다.

사무엘상 28장 1절을 보면 이번에는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전쟁에 함께하자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기름부음 받아 장차 왕이 될 사람이 자기 동족을 향해 칼을 들이댄다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의 미래는 끝장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블레셋 장수들이 반대합니다. 그래서 참전이 취소되고 시글락으로 돌아갑니다. 큰 위기를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아쉬운 척은 했지만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겠습니까? 쓸쓸히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무엘상 27장을 지나 30장까지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시글락에 도착한 다윗을 만납니다. 시글락은 적당히 타협하며 비교적 안전하게 살던 곳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살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3일 동안에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친 겁니다. 성읍을 다 불태우고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잡아갑니다. 입이 쩍 벌어지고 울 기력조차 없도록 사내들이 웁니다. 정말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생활이 서럽고 힘들었지만, 근근이 버텨왔는데 이젠 모두 다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돌변해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마치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잠시의 모든 만족도 사라지고, 더욱 침체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당장의 고난을 피하려고 적당히 내 생각으로 살다 보면 더 큰 고난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을 당할수록 도리어 원칙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광야입니까? 시글락입니까? 물질이 채워지고 안정감을 누리는 곳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잊게 하는 곳이라면 시글락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영적인 곤고함 속에 있다면 시글락입니다. 거짓과 속임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무감각해 있다면 시글락입니다.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시글락은 영적으로 무뎌지고 무기력해지게 합니다. 그때부터 그곳이 전쟁터가 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광야에서 다윗은 비록 고단한 삶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기억했습니다. 깨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하십니까? 조금만 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가야 할 갈림길에서 함부로 시글락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시글락을 선택하면 당장은 위험을 모면하는 것 같지만 점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인생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도 거두실 수도 있는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곳을 선택하십시오. 비록 고단하고, 안전해 보이지 않고, 식솔을 거느리기에 힘든 광야의 삶일지라도 그곳이 주님과 만나는 자리라면 더 안전하고, 영원하고, 채워지는 곳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있습니까? 내 생각의 늪에 빠져들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내 생각으로 걸어왔던 내 인생길을 이젠 멈추십시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다급한 순간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무엘상 30장 6절을 보면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수많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모면하게도 하시고 길을 여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피한 것도, 또 잃었던 가족들을 되찾은 것도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야 할 갈림길에서 생각대로만 사시겠습니까? 기도하며 사시겠습니까? 광야를 택하시겠습니까? 시글락을 택하시겠습니까? 기도하면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가장 바른길을 선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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