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학 진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해를 쉬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연좌제로 인해 떨어지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하루는 같은 교회 장로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용한아! 너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할 말이 없었다. 사관학교 불합격은 나에게 깊고 어두운 구덩이와 같았다. 그 때 나는 그 구덩이에 빠진 채 헤어날 생각도 못하고 두 손만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장로님은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여셨다. “너는 신학대학에 가야 할 사람인 것 같아. 딴 마음 먹지 마라.” 그리고는 총신대학을 추천해 주셨고, 입학금까지 마련해 주셨다. 장로님은 어릴 적 당신도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못했는데, 내 모습이 마치 옛날 자신을 보는 듯 측은했던 것이다.

약수동은 청년시절의 나를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 인도하신 훈련 장소였다. 사진은 1960~70년대 약수동 풍경.
약수동은 청년시절의 나를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 인도하신 훈련 장소였다. 사진은 1960~70년대 약수동 풍경.

나는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고, 그 해 또래보다 늦게 총신대학에 입학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사관학교에 떨어지고 신학대학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고 말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간절함도 없었고, 내가 원하던 대학에 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 때 나를 인도하셨고, 인생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며 바라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달라졌지만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얼마동안은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다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서울 약수동에서 입주 과외를 하게 되었다. 내가 학비를 벌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 교인이 자기 친척집 아들을 소개해 준 것이다.

그 집은 약수동 사거리에서 장충동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층 양옥집이었다. 그 때 서울 부잣집을 난생 처음 경험했다. 고급 승용차에 가정부까지 있는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입주 과외는 말 그대로 그 집에서 숙식하면서 일대일로 과외공부를 봐주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그 집 중학생 아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한 달을 하면 6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 돈을 6개월 모으면 당시 한 학기 대학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가르치는 학생의 성적이 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긴 했지만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서는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부수입도 있었다. 내가 믿을 만 했던지 주인아주머니는 종종 집세를 받아오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주인집은 서울 여기저기에 집을 세놓고 있었는데, 나는 버스를 타고 주소에 적힌 집을 찾아가 월세를 받아 오곤 했다. 심부름을 다녀오면 주인아주머니는 수고비로 500원이나 1000원을 주시곤 했다. 나로서는 꽤 쏠쏠한 용돈이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해서 점심을 굶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주인아주머니는 과외비 외에 점심 값으로 매일 아침 500원씩을 줬다. 그러나 나는 점심을 굶고 그 돈을 모았다. 사흘을 굶으면 책을 한 권 살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책에 빠져 있었다.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좋았지만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점심을 굶어야 하는 탓에 최대한 아침밥을 든든히 먹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배가 고팠다. 학교를 마치고 오후 4시쯤 집에 돌아오면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점심 값을 받은 탓에 밥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꼼짝없이 저녁 밥 먹을 때까지 내 방에 틀어박혀 배고픔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부엌 한 편에 있는 냉장고에는 부잣집답게 늘 먹을 것이 많았다. 그러나 가정교사 신분으로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2년 동안 약수동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수동 입주 과외를 했던 내가 그 동네에서 두어 정거장 거리밖에 안 되는 옥수동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오갔던 동네로 20여년 만에 다시 돌아와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일들을 힘쓰고 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요, 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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