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그 권세가 막강해 세상을 지배했다. 교회의 영성은 힘을 가진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을 때 불꽃 같이 빛났다. 교회의 힘이 세속이 아닌 하늘에서 올 때 세상을 능가하는 빛이 났다.

교회는 산 속에 고립돼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마을에 위치하며 그 삶 속에 함께 함으로, 그 모습이 공개되고 세간의 마음과 입술에서 회자된다. 특히 요즘은 갖은 정보가 공개되고, 정보의 오류가 홍수처럼 흘러넘친다. 그 속에서 교회가 있는 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거나,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영적 애씀이 필요하다.

지금 교회는 수동적 평가의 대상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품고 뜨거움 마음으로 세상을 설득하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요즘의 한국교회는 세상과 문을 열어놓고 교류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일방적인 느낌일 뿐이다. 세상은 교회를 바로 알지 못하기에, 너무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다. 세상이 아는 교회는 90%의 순기능과 10%의 역기능을 가진 곳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교회를 90%의 역기능과 10%의 순기능을 지닌 집단으로 파악하거나 주장한다.

조작된 사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다가서야한다. 교회에 대한 오해를 단순히 그들 탓이라고 치부하면 우리 마음은 가벼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 유익을 얻지 못할뿐더러, 우리는 배려와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어떤 세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왜 이렇게 기독교가 적대적 대상이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파악한 후에 인식 개선을 위한 설득을 시도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세상을 품고 가슴과 부르짖음으로 기도했지만, 그들의 아픔과 현장에 가서 기도하지는 못했다. 건물을 짓고 그 문을 열어놓고 와서 사용하라고는 했지만, 그 건물을 팔아서 나누어주지는 못했다. 교회유지와 세상을 돌봄의 퍼센트를 기계적으로 정하지 못했고, 우리는 언제나 상황적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실제로 세상을 보살필 수 있는 우리의 여력은 너무 적었다. 그 결과 교회는 뭉쳤으나 세상과는 멀어졌다.

설득은 마음을 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음을 주는 것은 내 생활의 실제를 줌으로 내 삶의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다른 것을 이루지 못하거나 내가 이루고 싶었던 한 부분을 이루지 못하는 상실이 수반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규모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한 수준은 언제나 빈한하고, 결단의 수준은 언제나 가슴 아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옳고 더 큰 기쁨임이 분명하다. 손해를 안 보고, 가슴 아프지 않고, 논리적이기만 해서 무슨 수로 세상의 가슴을 움직이는 설득이 이루어지겠는가.

세상이 교회에 적대적이라면, 그들의 아픔을 교회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파서 소리를 질러도 교회가 듣지 못함에 대한 아픈 가슴의 표현이다. 환자는 돌아보아야하고, 환자를 돌보다 보면 나도 환자임을 깨닫게 되어 같이 치유받게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야한다.

우리는 이제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한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거나,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거나,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 인생에게 죄로부터의 자유와 영원한 생명구원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자를 돌려보내거나, 배고픈 자에게 천국에 가면 풍요로우니 이 세상에서는 참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나는 자들을 낫게 하셨고, 기적으로 배고픔을 채워주셨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 외면치 않아야한다.

설득은 상대의 마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상대에게 얼마나 순도 높게 진실할 수 있는 가의 투쟁이며, 상대에게 판단과 결정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진실이 상대를 감동시킬 때 진정한 설득이 이루어지며 마음의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말 외에 가진 것을 주어야한다.

한 번 하면 능력이고, 계속하면 축복이니 끝까지 해보자. 세상을 설득함은 내가 세상을 죄인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올 가여운 둘째 아들로 볼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뜻하게 바라보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설득하려는 의지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음을, 내 마음의 만족에서 그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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