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 이야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부활의 감격을 누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야

성경적 설교는 본문에 근거, 삶의 변화 끌어내야 한다

오빠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픔을 겪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을 오빠가 죽는다는 것은 한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나 마찬가집니다. 두 누이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주님,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은 평소에 나사로를 참 사랑하셨고, 두 누이와 나사로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병이 들면 의사를 불러야지, 예수님을 부르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설교를 시작할 때 가장 무난한 것은 본문으로 인도하는 예화입니다. 성도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노력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예화는 대부분 성도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예화로 시작하지 않을 경우에 좋은 방법은 본문을 이야기식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주제나 교리를 설교할 때는 서론에서 분명하게 주제를 밝히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두 가지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분,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생활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평소 이 정도 되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병을 고쳐주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간곡한 부탁에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이틀을 더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4) 인생 문제는 현실입니다.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걸림돌이고 아픔이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순간마다 다가오는 인생 문제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이겁니다.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 지났습니다. 무덤 앞에 왔을 때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과 조문을 위해 찾아온 유대인들이 곡하는 소리였습니다. 울음소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특별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고통하는 인간의 죽음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신 예수님. 본래 사람이 이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신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나사로였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도 마리아, 마르다도 예수님을 참 사랑했고 예수님도 그들을 참 사랑했습니다. 이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우리 아픔을 아시고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 우리가 때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흘리는 눈물을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마음이 이겁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교회, 아파하는 형제와 함께 아파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 진행이 있는 본문은 그 이야기를 따라 본문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예화를 들고 적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강해설교의 일반적인 구성은 한 본문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주요 주제를 찾은 후에 그 주제를 본문의 흐름을 따라 설교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본문을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를 본문을 통해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본문이든 교리적인 본문이든 마찬가집니다. 성경저자가 특정한 상황 속에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주제는 본문에 나타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픔의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가에 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짧고도 분명합니다. 내가 다시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마르다의 고백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리도 이 상황이 되면 똑같이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할렐루야 아멘하면 좋겠지만 어찌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르다라고 믿음이 전혀 없는 여인이 아닙니다.”

설교전달에서 가능하면 직접화법이 좋습니다. 설교는 본문의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표현하면 간접적 보도 같은 효과를 얻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할 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넘어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세, 능력, 위엄이 나타나는 것, 하나님이 누군지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전에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상식과 이성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사로잡히고, 내 가치관에 갇혀 있는 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기에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는 믿음, 이게 쉽지만 않습니다. 평소에 믿음으로 살고자 고백하고 노력해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상식과 이성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말씀하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까요? 하나님이 역사를 행하실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 살리는 일은 하나님 하실 일입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라!” 물고기를 보내는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그물을 내려야 할 사람은 우립니다.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베드로가 할 일은 주님 말씀 믿고 순종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에 중요한 원리가 이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인생 참 힘들게 살게 됩니다. 물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옮겨놓아야 할 돌은 어떤 것입니까? 내 생각과 맞지 않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옮겨야 할 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내가 여전히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아, 내 확신, 전통, 익숙한 습관, 말씀보다 나를 지배하는 규율.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옮겨 놓으라!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도 내 생각으로 인생을 결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의 삶으로 적용했습니다. 적용하는 시기는 중요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삶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삼대지 설교를 하게 될 때는 대지마다 예화를 들고 적용하면 설교에 균형을 얻기 쉽습니다. 한 가지 포인트에 집중해서 설교할 때는 마지막에 적용하는 경우도 좋습니다. 성경적 설교의 요체는 본문해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근거하여 삶으로 연결하여 삶의 변화를 끌어내는 적용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깨우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음의 어둠이라는 장막을 뚫고 생명의 세계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첫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입니다. 메시아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마지막 기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역사가 끝이 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오늘 예수님이 정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순간 영적인 부활이 일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 육신이 죽음에 이른다 해도 영혼은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렇습니다. 이미 중생한 사람, 영적인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육체가 죽는 것을 성경은 잠자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영적부활은 예수님을 믿을 때, 중생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체 부활은 언제 일어날까요? 예수님 재림할 때 그날 육체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겁니다.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지, 직분이 무엇인지, 성경을 얼마나 아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진짜 신자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일과 부활의 참 의미를 소개하는 것은 본문의 해설을 넘어 성경신학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어떤 본문이든 그 본문은 성경전체의 한 부분이며 성경전체의 눈으로 볼 때 바람직한 성경적 해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영혼이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할 때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적 부활은 주님을 믿을 때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때 영적부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육신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아직 부활신앙이 없다면 오늘 주님이 물으십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처음 나온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똑같이 묻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살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신앙의 연륜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 그대로 믿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위대한 능력은 이 부활신앙이 오늘 내 삶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노래합니다. 지금 눈을 감아도 주님 앞에 설 것을 알기에 평강과 기쁨이 넘칩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 진정한 헌신도 가능합니다.

히틀러 치하에 감옥에 잡혀간 본회퍼 목사는 194548일 아침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본회퍼 목사에게 영국장교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세요.” 그를 향해 본회퍼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유학을 시작할 때 갑자가 병을 얻으시어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목사가 무슨 특별한 욕심이 있겠습니까? 유학을 잘 마치고 결혼해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내로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 편안히 잘 모셨으면 하는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유학하던 것을 중단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다니곤 했지만 속 깊은 눈물을 쏟곤 했습니다. 주님께 늘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모두 주님 앞에 가야하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빨리 어머니를 데려 가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야속하게 보이든지.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이 참 야속하게 보였습니다. 늘 아픈 가슴으로 기도하는 저에게 하나님이 마침내 보여주신 것은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어머니의 영혼을 더 좋은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도 4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용인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떠올릴 때마다 자주 묘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한번은 주님이 깊이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땅 아래서 찾으려 하는가? 그날 이후로 부모님이 묻혀있는 땅 아래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실 부모님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 십자가를 넘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 그가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이 갑니다. 절대로 이전과 똑같이 살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외쳤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의 피로 살리셨습니다. 언젠가 우리 육체도 한줌 흙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곧바로 주님 품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사모했던 주님을 만나 천국의 감격을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는 우리 육체도 다시는 썩지 아니할 육체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감격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생명 주신 하나님께 순간마다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죽은 내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나사로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이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부활의 감격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도 기독교 역사에 많은 증인처럼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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