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교회로부터 첫 분립한 역사를 가진 사월교회의 예배당 전경.
대구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교회로부터 첫 분립한 역사를 가진 사월교회의 예배당 전경.

믿음으로 인내하며 말씀 중심 신앙 놓지 않다
배위량ㆍ안의와 선교사가 내린 뿌리 통해 영적 지경 넓혀 … 역사국 조직, 발굴작업 활발

왕복 육십 리였다. 젊은 남정네들이야 그 먼 길 마다않고 오갈 수 있었겠지만, 나이든 부녀자들에게는 만만찮은 거리였다. 혹독한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까지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손수 도시락까지 챙겨가며 예배하기 위해 매주일 행군에 나섰다.

대구 사월교회(최영인 목사)는 이처럼 복음에 사로잡힌 이들로부터 시작됐다. 사월교회의 뿌리에는 영남선교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미국북장로교선교부 소속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와 그의 뒤를 이어 대구선교의 책임자로 나선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있다. 그리고 그 뿌리를 통해 신앙의 꽃을 활짝 피운 한국인들도 존재한다.

설립 12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신축건물을 사월교회는 안의와 선교사의 이름을 따 ‘아담스관’으로 명명했다.
아담스관 넬리카페에 전시된 붓과 벼루. 사월교회 당회록을 기록하던 도구들이다.

경산군 서면 매호동에서 살던 김명근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대구 약령시(현 약전골목)를 내왕하다 복음을 전해들은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덕경씨의 간곡한 권유로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예배를 통해 감화 받은 김명근은 열정에 휩싸여 마을사람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박태복의 어머니 관상댁, 이성근의 어머니, 조삼룡의 어머니 등이 매주 김명근을 따라 남문안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빌립보교회의 루디아처럼 사월교회 설립의 주축이 됐다.

마침내 1898년 겨울 김명근의 집에서 남녀 십여 명이 모여 예배하기 시작했다. 추위 속에 먼 길 왕래가 어려워 부득이 내린 선택이었지만, 날이 따뜻할 때는 간혹 남문안교회를 찾아가 함께 예배하기도 했다. 동네이름을 따 우매동교회 혹은 매호교회라고도 불리던 이 가정교회는 결국 남문안교회가 분립한 최초의 교회가 됐다.

안의와 선교사는 전도인 박덕일을 보내 이 교회를 돌보게 했다. 박덕일은 예배를 인도하는 동시에, 찬미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학습문답 등을 가르치며 교회를 반석 위에 세웠다. 글을 깨우치지 못한 교인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신앙으로 인한 열심은 이마저도 극복하게 했다. 1977년 사월교회 설립약사를 기록한 김원재 장로는 당시의 교회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하였든지 불과 3~4개월이면 국문만은 대개 읽을 정도였다. 아무리 60 노년이라도 일 년 안에 거의 성경찬송만은 읽을 수 있었다. 초대신자 그만큼 열심히 공부한 것은 보지 않고도 충분히 알만하다.”

사월교회 예배당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옛 종탑의 모습.
설립 12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신축건물을 사월교회는 안의와 선교사의 이름을 따 ‘아담스관’으로 명명했다.

안의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900년 첫 예배당을 건립하고, 1902년에 사월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복음사역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사월교회 성도들의 전도열정은 마을 일대를 복음화하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1899년 송서교회(현 풍각제일교회)를 분립한 것을 시작으로 봉화동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하거나 분립하며 영적인 지경을 확대해나갔다.

한편으로는 계동학교 측량학교 명덕학교 등 여러 학교들을 개교해 운영하며 교육선교 사업에 힘을 쏟기도 했다. 계동학교는 당시 경북 동남부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학교로서 교계 안팎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런 전통은 한 세기를 지나서 필리핀 인도 중국 등지에 수많은 선교지 교회를 세우는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다.

좋은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 봉건주의 사상’이 깊이 배인 이들로부터 적잖은 모욕과 핍박을 받기도 했다. 1905년 경산군 성주가 교인 대표 10여 명을 느닷없이 체포해 매질을 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시련들을 의연하게 극복하면서 오히려 교회에 대한 신망이 높아지고, 복음전파가 더욱 왕성해지는 전화위복의 결과가 나타났다.

사월교회 권중생 장로는 “교회 120주년 기념 역사집의 제목을 <사계절 훈풍은 아닐지라도>라고 정한 데는 영광의 시간들은 물론이고 굴욕의 시간들도 함께 기억하자는 뜻이 담겨있다”면서 “기나긴 세월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말씀 중심의 신앙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긍지”라고 설명한다.

아담스관 넬리카페에 전시된 붓과 벼루. 사월교회 당회록을 기록하던 도구들이다.
사월교회 예배당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옛 종탑의 모습.

권 장로가 관장하는 사월교회 역사국은 2년 전 조직되어, 120여 년에 걸친 시간 속의 보배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는 중이다.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와 김홍만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를 강사로 120주년 기념세미나를 열고, 역대 당회록의 문서파일화 작업을 진행하며, 세미나 내용과 김원재 장로의 설립약사 등을 묶어 역사집 <사계절 훈풍 아닐지라도>를 편찬한데 이어, 현재는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편지들을 완역해 발간을 앞두고 있다.

선교편지 번역본은 사월교회 뿐 아니라 대구경북지역 선교 초창기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국을 함께 섬기는 박휘종 목사는 “자료 수집과 보존사역에 박차를 가해 이 지역 기독교역사를 새롭게 정립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힌다.

사월교회의 하드웨어들도 기념비적인 의미들을 담아 재구성하는 중이다. 올해 4월 완공된 120주년기념관은 안의와 선교사를 기리며 ‘아담스관’으로 명명했다. 건물 안에 안의와 선교사의 아내 이름을 딴 ‘넬리 카페’라는 이름의 공간에는 역대 당회록 및 주일학교졸업증서 등 사월교회의 역사를 찬찬히 훑어볼 수 있는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 전체를 일종의 기독교역사관으로 꾸미는 작업에도 조만간 착수할 예정이다. 존 위클리프와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시대로부터 칼빈, 존 낙스, 미국 청교도시대를 거쳐 한국선교의 태동기와 사월교회 설립으로까지 이어지는 연대기적 전시구성이 1층 현관에서 시작해 건물 전체를 한 바퀴 돈 후 처음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형태로 이루어질 참이다.

“단순히 역사를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월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교우들과 외부 관람객들을 위해서도 본인의 신앙적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최영인 목사는 말한다.

역사는 이렇게 품고, 이렇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사월교회는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전통 잇는 모델교회 되고 싶다”
교회사 발굴과 보존 작업서 얻는 유익 커

인터뷰/ 최영인 목사

사월교회 부임 4년차를 맞은 최영인 목사(사진)는 120년 교회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통해 얻은 기쁨과 보람을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교회설립 시기와 관련된 자료를 확인했을 때의 경험을 인상적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역대 당회록 중에서 애석하게도 첫 번째 당회록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월교회의 설립연대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1901년으로, ‘경북교회사’에는 1902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에도 바로잡을 근거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도 아담스관을 건축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교회설립 120주년 기념관인 아담스관의 첫 단체방문객은 풍각제일교회의 교역자와 성도들이었다. 사월교회로부터 첫 번째로 분립한 바로 그 교회이다. 이 교회가 역사탐방 차원에서 모 교회를 찾아와 제공한 1922년의 문서는 한마디로 결정적이었다. 당시 총회보고용으로 작성된 이 문서에는 풍각제일교회의 설립연대가 1899년 3월로 나타나있으며 ‘청도 송서에서 매호교회 때부터 출석하던 김경수 씨가 교회를 설립’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사월교회로부터 총 13개 교회가 분립되었는데, 특히 경청노회에 소속된 교회가 많아 노회의 모교회로서 존중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교회의 역사를 지역교회사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최영인 목사는 특히 사월교회가 드러내는 신앙적 정체성이 다른 교회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사도신경,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등 개혁신학의 핵심을 전수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종교개혁에서부터 사월교회 설립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활용해 교회당 전체를 역사전시관으로 꾸미는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는 작업이다.

“그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장로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는 모델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바른신학을 놓치지 않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구선교의 선구자 안의와 선교사

제임스 에드워즈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제임스 에드워즈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1867년 미국 인디애나주 맥코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에드워즈 아담스(한국명 안의와)는 맥코믹신학교 졸업 후, 미국북장로회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95년 5월 29일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왔다.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와 함께 영남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된 안의와 선교사는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도착했다. 이후 대구에 선교기지를 개설하여 대구·경북 일대에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들과 대구 제중원(현 동산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을 세웠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경북지역 복음화를 위한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아내 넬리 딕의 죽음이라는 시련 속에서도 선교사로서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1923년 병으로 대구를 떠날 때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전도기금으로 내놓았다. 장남 안두화 목사도 대를 이어 대구에서 사역하며 계명대학교를 설립했다.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는 안의와 선교사가 세운 사월교회, 범어교회, 반야월교회, 대구서문교회 등 4개 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을 제104회 총회에 청원할 방침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