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다가가 가치관과 생활양식서 변화된 삭개오 이야기를 21세기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로 만들어야

진정한 행복 예수를 만나 위대한 변화 시작합시다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삭게오 이야기를 통해 전할 수 있는 설교의 주제는 많습니다.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난 삭게오의 열정,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했지만 얻을 수 없는 절망, 재물을 포기함으로 하늘을 얻는 위대한 결단 등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다루든 삭게오 이야기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부분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입니다. 삭게오의 인생 스토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킵니다. 예수님 없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해도 결국 외로움과 허무에 빠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삭게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에 찾아오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한 진정한 삶에 의미와 기쁨을 선물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는 설교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설교는 대지를 나누지 않고 본문의 흐름을 따라 설명하고 예화를 들고 적용하는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본문을 잘 드러내고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 어떤 설교 형식이라도 가능하지만, 삭게오 이야기처럼 본문 자체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는 본문 흐름을 그대로 살려내는 설교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있다면 행복이 될 것입니다. 4세기에 성 어거스틴이 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행복을 갈구한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무엇도 이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다. 다른 것을 갈망하는 사람도 결국 목표는 이것뿐이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예외가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모두가 행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이란 것이 교과서처럼 가르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뉴욕의 WBAI 라디오 방송국의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 프로그램을 진행한 두 사람 있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린 로즌과 동기부여 강사 존 리티그. 이 커플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서로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어주고 동반자살을 한 일입니다. 로즌과 리티그는 행복을 강의할 줄은 알았지만 정말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의 시작은 설교 전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성도들의 마음문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로 본문과 관계되는 예화로 시작하거나 본문내용을 스토리식으로 풀어내거나 혹은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도 좋습니다. 행복을 추구했던 삭게오의 인생을 떠올리면서 기독교 역사에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어록을 통해 행복추구는 인류의 보편 목적이라는 것과 하나님을 벗어난 행복강연 진행자의 불행한 말로를 소개함으로 진정한 행복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삭게오의 삶으로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그렇게 행복을 추구했던 한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삭게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행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지배를 당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나라 없이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사라진 단어가 있다면 꿈과 희망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로마통치 하에 아무런 꿈도 펼칠 수 없었던 시대, 돈이라도 많이 벌어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편하게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행복을 빼앗아간 또 하나의 문제는 외모의 문제, 키가 작았습니다. 자신에게 발견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고, 디딤돌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삭게오는 훌륭한 사람에 속합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세리라는 직업입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했던 직업입니다. 로마제국에 일정한 세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취했기에, 많이 거둘수록 더 큰 부자가 되었던 일이 세리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재물은 쌓였지만, 친구는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갈수록 커져갔지만 평안은 사라지고, 음식은 풍부했지만 맛을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은데, 실제 만족도 기쁨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삭게오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설명할 때 성경에 근거한 내용과 로마시대의 억압 속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 상상의 날개를 펼친 부분입니다. 로마 식민지 속에서 일어난 젊은이들의 좌절과 삭게오의 외형이 주었던 좌절감 그리고 자아성취를 위해 돈을 향해 달려갔던 인생과 물질이 결국 가져다주지 못한 행복을 소개했습니다. 설교가 성경구절보다 길게 설명된다는 사실은 성경구절 외의 이야기를 무엇인가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설명할 때 문자나 배경 해석 혹은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중요한 것이 상상력을 발휘해 본문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상상력의 범위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도움이 될 때 가능합니다.

삭게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소원이 있지만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만족이나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난 나라를 뒤로하고 유학이든, 자녀교육이든, 직장이든 다양한 이유로 미국으로 왔습니다. 누구나 꼭 이루고 싶은 인생에 목적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충분히 돈을 벌고, 아이들이 잘 자라나고, 남들보다 성공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해도 모두 발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을날 낙엽이 거리에 날릴 때, 서녘 하늘에 황혼이 찾아올 때, 가슴 깊숙이 비어있는 외로움과 공허감, 피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파스칼이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방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행복을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데서 행복을 찾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바다에서 마실 물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창조한 하나님을 떠나서 누릴 수 있는 행복, 평안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이 사실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성경 진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다가와서 가치관과 행동을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삭게오의 이야기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본문과 오늘 삶의 다리놓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놓기를 통고할 때 설교는 2000년 전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지성세계를 대표하는 초대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를 기억할 것입니다. 평생 무신론을 가르치며 지성의 세계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10년 전, 73살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교수가 <우물을 파는 사람> 책에서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명예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기더라. 돈 벌려고 애쓰니까 되더라.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나아지더라.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도 내가 좋아하는 글을 봐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고 느껴졌다.” 사람들의 눈에 행복을 누릴만한 모든 조건을 성취한 사람이지만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지만 진정한 삶의 만족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삭게오처럼 세상의 다른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한번쯤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인사를 소개할 때는 이런 문제가 인류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화는 우리 주변 이야기 특히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성도들 이야기나 목회자 자신의 개인 이야기가 효과적입니다. 예화를 사용하는 시기나 빈도는 정해진 것이 없지만 중요한 내용을 소개할 때는 가급적 예화로 설명을 보충하거나 삶 속으로 실감나게 다가오도록 하면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삭게오에게 들려온 소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삭게오 마음에 무엇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을 만나면 무엇인가 인생에 해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쉽지는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의 키는 작았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문제라는 것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일 뿐입니다. 삭게오는 사람들 앞으로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 삭게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있는 삭게오, 누구 하나 관심두지 않았던 조롱의 대상이던 그 삭게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삭게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아니라고, 저렇게 같은 민족의 피를 빨아먹은 사람,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 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고.” 사람들은 삭게오의 허물과 죄를 보았지만, 예수님은 마음속 비어있는 방을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달려온 인생이지만 여전히 공허와 허무로 가득 찬 그의 마음에 들어가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어야겠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인 된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사랑하셔서 죄인과 함께 어울리시고 죄인을 품으시고 사랑하신 우리 예수님.”

예수님과 삭게오의 만남까지 진행되는 것까지 보면서 나타난 것처럼 설교의 형식은 다양하지만 가장 무난한 것은 본문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예화를 들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말이 아무런 주제나 방향 없이 문자의 주석에 치중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가되 그 주제와 연결하여 본문을 소개하면 설교의 주제도 부각되면서 본문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게오의 위대한 변화는 즉각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준 힘이 물질이었는데, 그가 주인처럼 받든 것이 돈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난 순간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늘의 기쁨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좀 더 채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는데, 예수님으로 채우고 난 후 좀 더 베풀고자 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면상 적용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지만 이 부분에서 삭게오의 변화를 통해 회중에게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삶의 가치관과 생활양식 모든 면에 혁명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언젠가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을 텐데 삭게오가 보인 급진적인 변화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든 가치관이나 직업관이나 결혼관이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삭게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삭게오 이야기가 아니라, 삭게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오신 예수님,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한 영혼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 인류구원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삭게오를 위해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흘린 피 때문에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았고, 예수님의 그 기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단순히 사람이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의 복음과 구원 받은 사람의 새로운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삭게오의 이야기로 끝을 낼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이 삭게오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여리고로 지나가신 예수님이 이 시간 오늘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신가? 저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는데요. 예수님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예수님이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요. 기억하십시오. 평생 노력한다 해도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이 만족할 수준에 이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게오가 준비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 하나가지고 한 걸음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삭게오의 마음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나가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 저도 인생의 참된 행복, 진정한 만족, 내 삶을 바쳐도 좋을만한 의미 그것 찾고 싶습니다. 간절한 우리 마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무에서 내려오라. 네가 붙들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네 집에 들어가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 물어보십시오. 나의 인생을 맡길만한 그 분을 만났는가? 많은 사람이 걸어간다고 맞는 길이 아닙니다. 진짜 내 인생을 드려도 좋을만한 가치있는 인생, 그것하다 죽어도 좋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삭게오가 오늘 그 분을 만난 것입니다. 인생에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삭게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열심히 추구했으면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을 보라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바라보라 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소유하고 영원한 생명, 진정한 행복, 확실한 인생을 살라고 하십니다.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삭게오처럼 나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들, 최근에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신 분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다시 주님 앞에 나오신 분들, 아직 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구원 얻는 자녀가 되어, 한 번의 인생에 하늘에서 내리시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하게 적용하고 촉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삭게오가 만난 예수님을 모든 회중이 다시금 만날 수 있도록 초청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없이 여전히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든, 예수님을 만났지만 삭게오처럼 물질이나 가치관에 근본적인 변화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하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최근의 설교학 흐름은 이런 적용이나 촉구를 피하라고 강조하지만 성경을 진리로 믿는 설교자와 진리의 말씀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확실하게 삶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문의 의미 풀이가 아니라 본문의 말씀이 나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삭게오 이야기 설교에서 무엇이 가장 기대되는 변화일까요? 설교자가 기대하는 변화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변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죄인을 만나 구원시키러 오신 예수님이 본문의 핵심이라면 오늘 설교에서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오래 전에 예수님을 만났으나 감격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나 같은 죄인을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한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신자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라면 아직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에게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결단이 일어난다면 설교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참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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